이규배 할머니, 지난 2월 82세에 한림성심대 사회복지과 전문학사 취득
70대부터 방송통신중·고등학교를 다니며 못다 이룬 배움의 뜻 이뤄나가
일반 학위과정으로 입학, 20대 학생들과 함께 공부하며 우여곡절 이겨내
이규배 할머니 “살아있는 동안 항상 배우며 지낼 것…허무한 인생은 싫다”

여든 두 살의 나이로 사회복지 전문학사 학위를 취득한 이규배 할머니. (사진=오지희 기자)
여든 두 살의 나이로 사회복지 전문학사 학위를 취득한 이규배 할머니. (사진=오지희 기자)

[한국대학신문 우지수 기자] 1941년생 82세. 팔순을 넘긴 노인이 대학 수업을 듣고 학위를 취득하기란 얼핏 생각해도 쉬운 일은 아니다. 이규배 할머니는 지난 2월 한림성심대 사회복지과 전문학사 과정을 마치고 학위를 땄다. 성인학습자를 위한 만학도 과정이 아닌 일반 반으로 입학해 20대 동기들과 함께 수업을 들었다. 팬데믹 기간에는 화상 강의도 거뜬히 수강했다. 처음에는 서툴렀던 컴퓨터 타자와 발표 자료 제작, 온라인 과제 제출도 이제는 능숙하다. 그는 졸업 후에도 배우는 것이 좋아 매일 저녁 야간학교에서 공부하고 있다.

흐르는 시간과 속절없는 세월은 누구에게나 공평하다고들 한다. 하지만 이규배 할머니는 그 시간을 어떻게 활용하느냐에 따라 더 풍성한 인생으로 만들 수 있다고 그의 경험으로 말한다. 평생 대학 문턱을 밟고 강의를 듣는 일이 꿈이었다는 이규배 할머니를 지난 12일 만나 파란만장했던 대학 졸업까지의 이야기를 들었다.

- 올해 2월에 대학을 졸업했다. 요즘은 어떻게 지내고 있나.
“아직 컴퓨터 타자 속도가 느려서 문서작성을 더 배우고 있다. 또 전에 다니던 야간학교도 꾸준히 다니면서 영어·국어 공부도 같이 하고 있다. 영어는 간판을 읽을 때 뜻은 모르더라도 입으로 읽을 수는 있는 정도다. 단어 하나하나를 곱씹으면 그동안 배운 단어 뜻이 떠오르긴 하는데 아직 문장을 척척 만들어서 말하지는 못한다.”

- 중·고등학교도 남들보단 늦은 나이에 입학해, 졸업했다. 뒤늦게 배움에 도전한 계기는.
“방송통신중·고등학교를 다닌 해가 2015년쯤이니까 7~8년 정도 됐다. 중학교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바로 한림성심대로 진학한 셈이다. 내가 국민학교 3학년 때 한국전쟁(6·25전쟁)이 터져서 경남 상주까지 피난을 갔었다. 그때 교육을 그만뒀었는데, 당시 어린 내가 가장 노릇을 해야 했다. 어머니는 편찮으셨고 첫 돌 지난 동생도 있었다. 그래서 국민학교만 졸업하고 중학교는 가정 형편상 진학하지 못했다. 공부가 우선이냐 생계가 우선이냐 고민했는데, 어쩔 수 없이 공부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어린 나이부터 일하면서 가정을 이끌었다.

결혼하고 나서도 학생이었던 남편과 만나 경제적으로 힘든 신혼을 보내면서 새 가족 생계를 이어갔기 때문에 공부에 눈 돌릴 틈도 없었다. 그래서 공부는 내 마음에 항상 응어리진 앙금이었다. 누가 공부 얘기만 하면 가슴이 움츠러들었다. 학교가 늘 그리웠다. 나이가 들어도 예쁜 초등학교 교정만 보이면 ‘아, 내가 저런 학교를 나왔으면 얼마나 좋을까’하고 생각했다. 잘 사는 집은 한 번도 부러워해 본 적이 없는데 학교 다닐 형편, 그 하나만큼은 부러웠다. 자녀로 4남매를 뒀다. 아이들 시집·장가 다 보내고 나니 남편이 아파 세상을 떠났는데 그 세월 동안 많이 의지했었는지 한동안은 모래벌판에 혼자 남겨진 기분이었다.

이후 아픔을 이겨내기 위해 일을 열심히 했다. 그러다 보니 못다 한 공부 생각이 나면서 어디 한번 ‘하는 데까지 해보고 가는 데까지 가보자’고 결심하고 시작했다.”

- 왜 사회복지과였나.
“사회복지과를 선택한 이유보다 이 전공을 공부하면서 느낀 점이 크다. 처음에는 노인 건강을 챙기고 싶은 마음에 물리치료과를 지원했는데 나이 든 몸으로는 부담이 되는 일이라는 걸 느끼고 복지학과로 왔다. 복지가 뭔지도 모르고 살았는데 장애인 센터에서 봉사 실습을 하다 보니 편견이 없는 사회를 만들고 싶어졌다. 사람들을 다독여주고 사랑할 수 있게 됐다.”

- 중·고등학교 교육과 대학 교육은 또 다른 느낌이었을 것 같은데.
“중·고등학교 때도 내가 제일 나이가 많긴 했지만 그래도 어른들이 종종 있다 보니 괜찮았는데, 대학은 보통 스무 살 언저리 학생들이 대부분이라 입학 결정을 내릴 엄두도 안 났다. 학교 앞에 멍하니 차를 세워놓고는 차 안에서 ‘들어갈까, 말까’ 고민을 한참 했지만 결국 입학했다.

수업 들으면서 힘든 점도 많았다. 특히 책만 보고 공부하는 게 아니라 컴퓨터를 사용해서 프레젠테이션을 만들어야 하고 또 앞에서 발표할 일이 어찌나 많던지…. 조별 발표하는 것도 일이었다. 결국 책으로 하는 공부에서 경쟁력을 가져야겠다 생각하고 남들 한 번 읽을 때 나는 백 번 읽겠다는 마음으로 공부했다. 피피티는 조카딸 도움을 받아서 공부하면서 조금씩 익혀나갔다.”

이규배 할머니는 종종 국악 봉사활동을 다닌다. 한림성심대 대강당에서 굿거리장단을 연주하는 모습. (사진=오지희 기자)
이규배 할머니는 종종 국악 봉사활동을 다닌다. 한림성심대 대강당에서 굿거리장단을 연주하는 모습. (사진=오지희 기자)

- 20대 학생들과 함께 공부한다는 게 쉽지 않았을 텐데 대단하다.
“쉽지 않았다. 우선 팬데믹 때문에 학교에 들어가는 것부터 고역이었다. 학교 들어가는 절차가 너무 복잡하고 어려웠는데, 조카딸이 수월하게 들어갈 수 있게 도와줘서 그나마 괜찮아졌다. 마스크도 쓰고 다녔으니까 이 나이에는 너무 힘들었다.

교수님들이 과제는 또 왜 그렇게 많이 내주시는지, 컴퓨터로 과제를 제출하면 조금만 늦어도 감점 처리를 받으니까 최대한 시간을 확인하면서 공부했다. 키보드 타자가 늦으니까 수기로 써서 과제를 제출한 적도 많다. 그러면서도 과제를 빼먹은 적은 한 번도 없다.

한 번은 발표 수업 때 열심히 연습해서 첫 번째 순서로 발표했는데, 내 발표가 끝나고 교수님이 오시더니 학생들한테 발표는 이렇게 하는 거라고 하면서 ‘너무 잘하셨어요’라고 칭찬해주셨다. 그때가 너무 뿌듯했다. 또 한 교수님은 수업을 마치면서 말하길 ‘갈수록 빛이 났다. 조금만 더 수업 들으셨으면 최고의 학생이 됐을 거다’라면서 나를 ‘아름다운 씨앗’이라고 표현했다. 대학 공부가 살면서 가장 힘든 일이긴 했지만, 위안이 되는 날도 많았다. 대학 공부가 꿈이었는데, 결국 이뤄냈으니 졸업할 때 아주 보람찼다.”

- 아무리 힘들어도 노력을 멈추지 않을 수 있는 원동력이 궁금하다.
“사람은 살아있는 동안 노력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 아닐까. 하고 싶은 일 없이 가만히 있는 건 끝만 기다리는 허무한 인생 같았다. 밤중에 학교도 다니고, 수업을 듣다 보면 뭐라도 하나 얻으니까 배우는 재미가 있다. 맞춤법은 배워도 배워도 어렵다. 어설프게 아는 게 제일 싫다. 역시 하는 데까지 해보고, 가는 데까지 가볼 심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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