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석 전문대학혁신지원사업발전협의회장(영남이공대 산학협력단장)

남기석 전문대학혁신지원사업발전협의회장(영남이공대 산학협력단장)
남기석 전문대학혁신지원사업발전협의회장(영남이공대 산학협력단장)

1999년 3월 2일 대학교수로서 첫 강의를 한 기억을 아직도 잊을 수 없다. 미리 준비해 둔 양복에 노란색 넥타이를 매었다. 노란색이 시선을 집중시키는 데 좋다는 누군가의 말에 미리 준비해 둔 터였다. 학기 첫 주부터 강의를 정상적으로 해야 한다는 지도교수님의 가르침을 지키면서 교과서와 유인물의 모든 문자와 그림을 머릿속에 넣고 첫 시간부터 속사포 같은 말을 뱉어내었다.

어설픈 여유를 부리면서 학생들 책상 사이를 오가며 유인물을 보지도 않은 채 내 머릿속의 말 뱉어내기를 계속했었다. 준비한 농담에 학생들의 반응이 좋은 날에는 학생들의 수준에 맞지도 않는 전공 깊숙한 이야기를 가져와서는 ‘나중에 이런 것도 알아야 된다’는 교훈을 선사하곤 했었다. 마치 ‘교수님은 이 정도로 대단해’라는 유치함이 마음 한구석에 있는 듯했다. 학생들의 시선이 향하는 곳에는 오버헤드 프로젝트(overhead projector ; OHP)의 불빛이 비치고 있었다. 밝기가 그리 좋지 못해 커튼을 쳐서 어둡게 한 교실이었으니 학생 입장에서는 어두운 교실에서 교수가 혼자서 쉼 없이 내달리는 수업에 참 힘들었을 듯하다.

필자는 당시 교수로서 배우는 자들의 눈높이를 고려한 수요자 중심의 교육이 무엇인지 몰랐다. 가르치는 자로서 배우는 자들의 반응에 집중하지 못하고 지식 공급자로서 준비된 말들을 뱉어내기에 바빴다. 지금 생각하니 부끄럽고 후회되는 시절이다. 지금도 완전하다고는 할 수 없으나 2023년 5월 교수 생활 25년이 넘은 시점에서 어설펐던 시절을 되뇌면서 현시점의 교육 본질과 교수자 역할에 대해 생각해보고자 한다.

미래학자 앨빈 토플러(Alvin Toffler)는 “21세기의 문맹자는 읽고 쓸 수 없는 사람이 아니라 배우고(learn), 배운 것을 버리고(unlearn), 다시 배우기(relearn)를 못하는 사람”이라고 했다. 디지털 대전환 시대에 새로운 기술이나 아이디어를 배우고, 기존 생각이나 습관을 버리면서 새로운 환경에 적응할 수 있는 능력은 점점 더 중요해지고 있다. 2020년 세계경제포럼에서 발표된 ‘The Future of Jobs Report 2020’ 보고서에서는 미래 직업 시장에서 새로운 역량과 기술을 습득하고 기존 역량과 기술을 개선하기 위한 교육과 재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전 세계 근로자 중 50% 이상이 2025년까지 재교육이 필요할 것으로 예측했다. 계속 학습(continuous learning)의 가치가 어느 때보다 중요한 시점이다.

평생학습으로의 교육 패러다임 전환은 시대적 요구다. 대한민국 헌법은 제31조 제5항에서 ‘국가는 평생교육을 진흥해야 한다’고 규정한다. 이는 우리 헌법의 모든 조문 중에서 유일하게 ‘진흥’이라는 단어가 쓰인 조문이다. 그리고 2022년 12월 발표된 제5차 평생교육진흥 기본계획에서 ‘누구나 누리는 맞춤형 평생학습 진흥’이라는 서두 문구와 함께 잘 짜인 계획도 발표됐다. 여러 정부 재정지원사업에서도 성인학습자(신중·장년)의 맞춤형 교육과 진로 컨설팅을 강조하면서 업스킬·리스킬(up-skilling and re-skilling)을 핵심키워드로 하는 등 평생학습 정책의 대전환 필요성을 언급하고 있다.

지난해 10월 필자가 회장으로 있는 전문대학혁신지원사업발전협의회가 주관한 해외 선진 직업교육 우수사례 벤치마킹을 위해 독일 미텔슈탄트 대학(Fachhochschule des Mittelstands ; FHM)을 방문했다. 독일 주요 도시 9곳에서 캠퍼스를 운영하는 대표 평생직업교육 기관이다. 필자가 방문한 캠퍼스는 쾰른에 위치한 대학이었다. 방문을 환대해 주면서 다양한 설명과 질의응답이 오갔다.

요약하자면 산업계가 자신들이 필요로 하는 인력의 직무분석을 하고 이를 바탕으로 산업계와 교육기관은 공동으로 교육과정을 개발하는 것이다. 이렇게 개발된 교육과정은 교육기관에서 운영되는데 산업계도 교육 인력으로 공동 참여한다고 한다. 또한 지역의 기업과 학교가 밀접히 협력해 산업체 현장에서 실습 교육을 제공한다. 여기까지 보면 우리나라 전문대 산학협력 프레임과 크게 다르지 않다.

하지만 필자는 기업과 정부 역할에 주목했다. 기업은 인력을 공급받는 위치에만 있지 않고 인력양성의 주체로서 역할을 한다. 직무분석 단계부터 교육에도 부분적으로 참여함과 동시에 현장 실습 교육에는 전적으로 책임을 진다. 이렇게 할 수 있는 법률적 토대는 독일 ‘직업훈련법(Berufsbildungsgesetz, BBiG)’에서 직업훈련 주체를 기업과 직업훈련기관으로 명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미텔슈탄트의 듀얼 시스템이 가능한 또 다른 이유는 직업교육에 대한 정부 재정지원 시스템이다. 교육기관은 학생들에게 무상교육을 제공하고 교육에 필요한 시설, 장비, 교재 등은 대부분 정부가 제공한다. 산업체는 교육비용 일부를 부담하게 된다. 교육과정 중 학생 실습을 진행하면서 발생하는 일부 비용을 산업체가 부담하는 것이다. 또한 학생들의 인건비를 지급하기도 한다. 학생들은 일정 기간 산업체에서 일하면서 급여를 받는데 이 급여는 산업체에서 직접 지급하고 일부는 정부에서 보조금으로 지급하기도 한다. 이를 통해 학생은 일하면서 실무 경험을 쌓고, 생활비까지 충당할 수 있다. 이렇듯 미텔슈탄트의 듀얼 시스템은 평생직업교육의 법률적 토대와 함께 정부의 재정지원이 뒷받침돼 가능한 시스템이다.

올해부터 지역혁신중심 대학지원체계(RISE) 시범지역이 운영된다. 2025년에는 전국으로 확대할 예정이다. 대학에 대한 기존 정부 재정지원 방식과 사업비 지급경로의 변화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미텔슈탄트 모델에서 보듯이 평생직업교육은 교육기관, 산업체, 정부가 공동 주체가 돼야 한다. 이를 의무화하는 법률적 토대도 반드시 있어야 한다.

우리나라 국민 80% 이상이 25세 이상 성인이다. 성인을 대상으로 한 평생학습을 통해 지속적인 역량향상 정책을 펴는 것이 국가 성장동력의 핵심이 될 것이다. 생산연령인구(만 15~64세) 전망을 보면 2020년(3738만 명) 대비 2030년에는 3381만 명으로서 10년 사이에 9.6% 감소가 예상된다. 성인 대상의 평생학습과 직업교육에 대한 재원 확충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국내 직업교육 발전 측면에서 전문대는 큰 역할을 했고 지금도 고등직업교육 기관으로서 생존을 위해 치열한 변신을 하고 있다. 다양한 정부 재정지원사업을 기반으로 하기도 했지만 학령인구 급감으로 인해 성인 학습자뿐 아니라 고졸 재직자의 일학습병행 등을 통해 교육수요자를 확보하기 위해 갖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전문대 노력으로 인한 교육성과가 창출되려면 필자가 앞서 언급했듯이 평생직업교육 주체가 교육기관만이 아니라 산업체와 정부도 함께해야 한다. 이를 위해 평생 직업교육과 관련된 법률적 토대와 함께 재정지원 확충이 함께 돼야 한다. 특히 지자체가 중심이 된 산업체·대학 거버넌스를 이루는 상설 협의체 형태가 필수적이다.

전문대학혁신지원사업은 전국 132개 전문대 중 103개 대학이 참여한다. 일반재정지원사업으로서 대학별 자율혁신계획으로 진행된다. 현시점 교육의 메가트렌드인 평생교육의 거점으로 전문대가 자리매김하기 위해서는 교육 공급자인 교수의 평생교육 콘텐츠 생산역량을 강화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협의회는 이에 한국전문대학교수학습발전협의회(KCTL)와 연계해 평생학습 관련 교수학습 정책연구를 진행할 예정이다. 이를 통해 디지털 대전환 시대에 걸맞은 교수자 역량 강화 방안에 대한 실행방안을 도출하고자 한다. 에듀테크 기반 교육콘텐츠 생산역량 강화 방안 등 평생교육을 위한 교수역량을 체계화해 전문대 교원의 평생교육 역량을 강화하는 데 일조하고자 한다.

누구나 누리는 평생교육과 직업교육을 통해 행복한 대한민국을 만드는 데 전문대가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기를 바란다.

<한국대학신문>

저작권자 © 한국대학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