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형찬 수필가 겸 교육학자

백형찬 수필가 겸 교육학자
백형찬 수필가 겸 교육학자

‘정약용’하면 떠오르는 단어들은 ‘정조, 수원 화성, 광주 두물머리, 전남 강진, 다산초당, 목민심서, 흠흠신서, 경세유표, 유네스코 인물, 천주교’ 등이다. 정약용의 호는 다산이다. 다산의 삶은 그야말로 파란만장했다. 영조 때 태어나 정조, 순조를 거쳐 헌종 때 세상을 떠났으니 조선의 네 임금과 인연을 맺고 있다. 특히 정조와의 인연은 무척이나 깊었다. 정조는 다산으로 인해 빛났고, 다산은 정조로 인해 빛났다.

다산(茶山)은 우리나라가 낳은 위대한 인물이다. 서양 사람들은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사상가로 두 사람을 든다. 한 사람은 퇴계 이황이고 또 한 사람은 다산 정약용이다. 이황의 사상을 ‘퇴계학’이라 하고 정약용의 사상을 ‘다산학’이라 한다. 정약용이 남겨 놓은 사상이 인류에게 위대한 업적이 되었기에 유네스코는 2012년에 정약용을 세계기념인물로 선정했다. 한국인으로서는 최초였다. 다산 정약용은 훌륭한 학자이며 사상가였고, 청렴결백한 관료였으며, 놀라운 과학자이자 발명가였다. 그는 당대 최고의 의학자이고 의사였으며, 그리고 충성스러운 신하였고, 효성이 지극한 아들이었고, 자랑스런 남편이었으며 존경받는 어버이였고 훌륭한 스승이었다. 또한 놀라운 예술가이기도 했다. 그래서 다산을 ‘조선의 다빈치’라고 부른다.

다산이 쉰한 살이던 해에 집안에 경사가 났다. 외동딸 홍임이 시집을 가게 된 것이다. 사위는 다산의 친구 아들인데 다산초당에서 글을 배웠다. 다산은 그림을 그리고 화제(畫題)를 적어 시집가는 딸에게 주었다. 이 그림이 유명한 ‘매조도(梅鳥圖)’다. 유홍준 교수가 반드시 국보로 지정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수준 높은 작품이다. 매조도는 비단에 그렸는데 그 안에는 기가 막힌 스토리가 담겨있다. 다산이 강진에서 귀양살이할 때, 몸져누워 있던 부인이 헌 치마 여섯 폭을 보내왔다. 부인이 시집올 때 입고 왔던 분홍색 비단 치마였다. 그런데 세월이 많이 흘러 색이 변했다. 다산은 그 비단 치마를 가위로 잘라 첩(帖)을 만들어 두 아들에게 주고 나머지 천에 그림을 그려 시집가는 딸에게 주었다. 어머니가 시집올 때 입었던 비단 치마를 잘라 그 위에 아버지가 그림을 그리고 글을 써서 시집가는 딸에게 준 그림이 바로 매조도이다. 그림에는 활짝 핀 매화 나뭇가지 위에 한 쌍의 새가 나란히 앉았다. 새의 날개도 새의 부리도 예쁘다. 특히 노래하는 듯한 주홍색 부리는 정겹다. 한 쌍의 새는 딸과 사위로 같은 곳을 바라보며 지저귀는 모습이 가슴을 따듯하게 한다. 부부일심동체를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그림 밑에는 시집가는 딸에게 주는 아버지의 따뜻한 사랑이 담긴 시 한 편이 적혀있다.

다산의 산수화 한점을 더 보자. ‘원인필의도(元人筆意圖)’라는 작품이다. 가로 21센티, 세로 14센티로 아주 작은 그림이다. 그림 가운데는 빈 정자가 있고 정자 뒤로는 높은 산이 연이어 있다. 정자 둘레에는 키가 큰 나무들이 있고, 정자 앞으로는 강이 흐른다. 그림 분위기가 쓸쓸하다. 붓 자국이 세밀하지 않고 뭉뚝하다. 붓끝으로 그리지 않고 붓을 약간 뉘어서 그렸다. 조선 회화에서 좀처럼 찾아보기 어려운 화법이다. 화제에 ‘元人筆意’라고 썼다. 元人은 원나라 문인화가 예찬(倪瓚)이다. 다산의 산수화는 예찬이 그린 산수화와 비슷하다. 정자 모습도 비슷하고 정자 앞에 높이 자란 나무 모습도 비슷하고, 쓸쓸한 분위기도 비슷하다. 筆意는 예찬의 화풍과 비슷하다는 뜻이다.

결국 다산은 자신의 그림을 예찬의 그림과 비슷하게 그려 자신의 심경을 표현하려 했다. 산수화의 배경은 다산이 태어나고 자란 고향, 경기도 광주의 마재마을이다. 마을 앞으로는 큰 강이 흘렀다. 남한강과 북한강이 서로 만나 한 강물이 되어 흘렀다. 서로를 시기하고 모함하는 당시 정치 풍토를 안타깝게 여기며 한강처럼 함께 흐르길 소망하며 그림을 그렸다. 또한 어서 유배 생활을 끝내고 그리운 고향으로 돌아가 쉬고 싶은 마음을 담았다. 오랜만에 두물머리(兩水里)에 가고 싶다. 세미원 수련꽃이 활짝 핀 날, 다산을 만나고 싶다.

<한국대학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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