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우 가천대 석좌교수

이기우 가천대 석좌교수
이기우 가천대 석좌교수

새천년이 시작된 2000년이 되었음에도, 한 교실에서 50명이 넘는 아이들이 수업하던 시절이었다. 물론 60~70명이던 시절도 있긴 했지만, 그건 70~80년대 이야기다. 이런 콩나물 교실을 유지하는 유일한 방식은 강력한 통제 중심의 권위주의 교육과 주입식 수업이다. 2001년 7월 김대중 전 대통령은, 교육의 질을 높이기 위해서는 시급하게 학급당 학생 수를 줄이기를 원했고, 교육부 기획관리실장인 내가 그 실무 책임을 맡았다.   

학급당 학생 수 50명을 35명으로 줄이는 일은 초유의 계획이었고, 혁명이나 다름없었다. 2만 명 이상의 교사가 더 필요하고, 1000개가 넘는 학교를 신설해야 한다. 무려 16조 원이 들어가는 거대한 ‘교육여건개선’ 사업이었다. 누구도 이런 일이 가능할 거라고 생각지 못했다. 그러니 일을 추진하는 과정은 그야말로 가시밭길이었다. 교사 충원은 행정자치부와, 예산은 기획예산처와 합의를 해야 하는데 쉽게 승인해 줄 리가 없었다. 

2001년 7월 19일, 청와대 서 별관. 발표를 하루 앞둔 최종회의에 청와대 재경비서관 오종남, 청와대 교육비서관 정기언, 행정자치부 기획관리실장 김범일, 기획예산처 예산실장 박봉흠, 재정경제부 세제실장 이용섭 그리고 교육인적자원부 기획관리실장인 내가 참여하고 있었다. 이미 청와대 한광옥 비서실장이 각 부처 장관과 여러 차례 회의를 거쳤지만, 합의를 이끌어내지는 못한 상황이라 대통령의 속도 타들어가고 있었다. 

“50여명이나 되는 학생을 앉혀 놓고, 새 교육과정을 진행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도 경험했지만 콩나물교실에서 할 수 있는 건 단순 지식 전달 수업뿐입니다. 새 교육과정은 단원마다 성취 수준이 정해져 있는데 이걸 어떻게 실현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 주입식 교육과 대학입시경쟁만으로는 새로운 인재를 양성할 수 없습니다. 문제 해결 능력, 상상력, 판단력, 창의력을 기를 수 없다는 건, 다들 아시잖습니까. 경제가 급속도로 발전할 때는 대학 교육도 질보다 양이었지만 이젠 그런 방식으로는 경쟁력을 갖기 어렵습니다.”

정말 그랬다. 학벌이 좋을수록 문제에 부딪혔을 때 해결 능력이 떨어지는 경우가 많다는 걸 우리는 체험으로 안다. 기존의 우리 교육은 비판적·성찰적 해결 능력보다 단순한 수동적 수용 능력만을 요구해왔기 때문이다. 이런 공부만으로는 답이 없거나 새로운 창조력을 요구하는 경우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쩔쩔매게 된다. 언제나 예정된, 예측 가능한 문제만 맞닥뜨리면서 살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닌가.

하지만 어떤 설득도 소용이 없었다. 각 부처의 현실 운운의 벽은 높고 높았다. 대통령의 결단이 있을 때 교육 여건 개선을 이루려는 교육부와 나의 사명감은 부질없어 보였다. 회의 시간이 길어지고 절망감이 깊어갈 무렵, 나도 모르게 벌떡 일어섰다. 그리고 있는 힘을 다해 고함을 쳤다. 

“이런 한심한 사람들 말이야. 대한민국 1급이 이것밖에 안 돼?” 
나의 갑작스러운 행동으로 회의장은 금세 긴장감으로 팽팽해졌다. 나는 더 크게 소리쳤다. 
“나는 돌아갈게요. 오후에 기자들을 만나서 나는 공무원을 끝내겠다고 말하고, 내일 <교육여건 개선 계획> 발표는 없다고 말하겠습니다.”

정말 나는 모든 걸 던지겠다는 비장한 각오를 하고 있었다. 내가 자리를 박차고 나가자, 오종남 재경비서관이 황급히 나의 다리를 힘껏 붙들고 주저 앉혔다. 
 “교육을 위해서 투자하는 게 미래를 위한 투자지, 어디 뭐 돈 버리는 일입니까?”
 나는 열쇠를 틀어쥔 채, 꼼짝도 하지 않는 해당 부처 실장들을 향해 손가락질을 하며 목청을 높였다. 
 “어이, 당신들 이런 식으로 하려면 다 그만둬! 나도 그만 둘 테니!”
 나는 배석하고 있던 이현옥 행정관에게 백지를 달라고 했다. 

“당신, 박 실장!”
나는 기획예산처 예산실장을 향해 소리쳤다. 
“나도 사표 쓸 테니까, 당신도 같이 써!” 
분위기가 험악해지자, 참석자들 사이에서 ‘끄응’하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못마땅하다는 표시였다. 그러나 조금 전까지의 팽팽한 반대 기류는 한풀 꺾이는 느낌이었다. 오종남 재경비서관이 말을 거들었다.
“대통령이 의지를 갖고 추진하는 일입니다. 우리가 해내야 합니다. 어렵더라도 합시다!” 

그러나 아무도 선뜻 대답하지 않았다. 분위기가 바뀌어 가고 있긴 했지만, 아직 로켓을 쏘아 올릴 힘은 부족했다. 나는 다시 목청을 높였다.
“되니 안 되니 토론만 하다 끝낼 겁니까? 오 비서관님, 이거 되는 거예요, 안 되는 거예요?”   
 “이 실장님, 조금 기다려 보세요.” 
 오종남 재경비서관이 말했다. 여기저기서 탄식과 웅성대는 소리가 커졌다. 
 “빨리합시다! 머뭇거릴 시간이 어디 있습니까? 되면 되고, 안 되면 안 되고!”
 나는 단호한 목소리로 다그쳤다.
 “이렇게 웅성거리기만 해서야 되겠습니까? 각서 씁시다!” 

그 자리에서 나는 내 손으로 직접 합의 사항을 썼다. 예산과 인원 확보에 대해 합의 한다는 내용이었다. 사람들이 망설이며 웅성거리는 사이, 확실하게 치고 나간 것이다. 내가 먼저 교육부를 대표해 서명하고, 청와대 교육비서관, 재경비서관의 사인을 받은 후 나머지 참석자들에게도 돌렸다. 마침내 사람들이 마지못해 합의서에 서명하기 시작했다. 분위기를 완전히 반전 시켜 버린 셈이다. 합의 각서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1. 소요 재원은 2002년, 2003년 예산에 각각 전액 반영하고
  2. 교원 및 교수 증원도 계획대로 2002년부터 증원하기로 함.

나는 합의각서를 들고 당당하게 정부종합청사로 돌아갈 수 있었다. 함께 차를 타고 가던, 행정자치부 김범일 기획관리실장이 나에게 자기 서류철을 보여 주었다. 
“이 실장, 이거 한번 보세요. 오늘 합의 내용에 대한 동의가 어렵다는 내용들입니다.” 
서류를 보니, 정말 모두 합의 불가를 뒷받침하는 자료들이었다.
“하, 이 실장의 시퍼런 서슬에, 오늘 한마디도 못 하고 돌아갑니다. 돌아가면 우리 행자부 안에서 나를 보고 뭐라고 할 지…” 
그의 깊은 한숨에 나는 당당하게 대답했다. 
“실장님, 오늘 감사했습니다. 그런데 이거요, 우리가 오늘 중대한 결정을 한 겁니다. 이거 말입니다, 이런 일을 교육부의 이익이다 이런 식으로 보면 안 됩니다. 우리의 후손, 우리나라 경쟁력을 위해서 꼭 넘어야 하는 벽이었습니다. 그 벽을 넘는 데 큰 힘을 보태 주신 거예요.”

다음 날, 기적처럼 ‘7.20 교육여건개선 추진 사업’을 발표할 수 있었다. 관계부처 최종회의 결과, 초중고 교원 2만 3600명 증원. 3년 동안 1208개 학교 신설. 학급당 학생 수를 35명으로 감축! 총 16조 원이 들어가는 혁명적인 교육환경 개선 방안이었다. 

나는 <7.20 교육여건개선 사업>이라는 용단을 내려 주신 김대중 전 대통령에게 깊이 감사한다. 이 정책으로 우리나라도 선진국처럼 학생중심수업으로 가는 길이 가능해졌기 때문이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역사에 어떻게 평가될 지는 나는 모른다. 하지만 이 정책 하나만으로도, 김대중 전 대통령은 충분히 역사에 남는 ‘교육 대통령’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요즘도 여전히 정부의 교육 정책에 대해서 말도 많고 탈도 많다. 하지만 진짜 좋은 교육 정책은 전 국민이 환영할 수 있는 정책이어야 하지 않을까? 교사는 물론 학부모들도 좋아야 한다. 그런데 진짜 좋아할 사람들은 우리 학생들이어야 한다. 그들은 늘 우리의 희망이자 미래니까! 

<한국대학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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