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평중(한신대 철학과 교수)

동국대가 사회적 수요가 많은 학과는 정원을 늘리고 적은 학과는 줄이는 입학정원관리시스템을 도입했다. 학부제에서 다시 학과제로 돌아가는 대신 학과운영을 재학률이나 취업·진학률 등의 지표로 측정해 성과에 상응한 인센티브나 불이익을 주겠다는 것이다. ‘경영 마인드가 결여된’ 인문학을 비롯한 기초학문이 이 시스템의 주된 희생양이 되고 있는 건 자연스러운 결과다.

이 사례는 무척 상징적이다. 앞으로 대학에 대한 구조조정 압력은 갈수록 확산될 것이다. 한국 대학의 경쟁력에 대한 의문이나 줄어드는 인구 등을 감안하면 소수 명문대를 제외하고는 현상 변경의 태풍이 대학사회에 닥치는 건 필지의 사실이다. 적자생존을 핵심으로 하는 시장논리의 도전 앞에서 인문학을 위시한 기초학문은 어떻게 응전해야 하는가?

나는 인문학 전공자이지만 시장의 논리나 경영 마인드가 무조건 나쁘다고 생각지는 않는다. 그것은 현대사회를 구성하는 본질적 질서 가운데 하나이기 때문이다. 대학이 순수한 상아탑의 공간이기 때문에 시장논리로부터 면제되어야 할 특권을 지닌다고도 보지 않는다. 대학이라는 제도 자체가 전체 사회의 한 부분이므로 사회변화에 따라 대학에도 개신(改新)의 시도가 있어야 한다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인문학과 기초 학문의 위기를 어떻게 타개할 것인가의 문제는 좀 더 근본적이고 장기적인 성찰이 필요한 것처럼 보인다. 이 문제를 해당 전공의 대학교수나 연구원이 맞닥뜨릴 신분상의 위기로 축소 이해하는 건 단견이다. 그래서 다음과 같은 근원적 질문이 불가피하다. 만약 한 사회에서 인문학과 기초 학문이 정말로 쓸모없는 것으로 판정된다면 어떻게 해야 하나? 문명국가와 대학의 체면치레를 위해 외부 지원으로 근근이 연명되어야 하는가? 그러나 인문학으로 논의를 좁혀 말하자면, 만약 인문학이 진실로 소용없는 거라면 그것은 소멸되어야 마땅하다. 이것은 거부할 수 없는 지상명제다.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게 억지로 지속될 리는 없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쓸모 있음’과 ‘소용 있음’의 정확한 의미를 물어야 한다. 그 둘은 결국 같은 뜻일 터인데, 쓸모 있음에 시장적 효율성과 기능성의 차원만 있지 않다는 것도 상식이다.

왜 쌀 한 톨, 쓰임새 많은 물건 하나 만들지 못하는 인문학을 하는가? 그 이유는 인문학 전공 교수의 밥그릇 지키기로 왜소화된 제도 인문학이 아닌, 진정한 인문적 관심을 촉발하고 일깨우는 살아있는 인문학이 사람다운 삶의 감수성을 키우고 인간의 얼굴을 한 사회를 만드는 데 큰 쓸모가 있기 때문이다. 이를 우리는 ‘무용(無用)의 대용(大用)’으로 형용할 수 있을 터다.

인문학적 감성과 지성은 단기간에 창출되지 않으며 구체적으로 손에 잡히지 않지만 삶의 공간을 살 만한 곳으로 만드는 데 큰 역할을 한다. 현대 한국사회의 천박함과 뿌리 없음에는 다 이유가 있다. 제도교육 과정이 인문적 관심을 질식시키는 방식으로 구조화되어 있는 것도 한 배경이다.

대학과 관련해 한국사회의 수준을 고양시키는 근원적 처방은 무엇인가. 대학 학부과정을 인문학과 기초 학문 중심의 전인교육의 장으로 만들고, 전문적 직업교육과 학문 연구는 대학원에서 수행하게 만드는 것이 올바른 처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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