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8년 일제의 신사참배에 항거하며 자진 폐교
해방 후 남산의 일제 경성신사 터에 학교 재건

1903년 평양 숭의여학교 전경.
1903년 평양 숭의여학교 전경.

[한국대학신문 이정환 기자] 개화기인 1903년 마펫 선교사(Samuel Austin Moffett, 1864~1939)가 평양에 설립한 숭의학원이 31일 창립 120주년을 맞았다. 숭의학원은 이를 기념하기 위해 30일 남산 숭의여자대학교 내 마펫기념 숭의음악당에서 학생, 교직원, 졸업생 등이 한 자리에 모이는 창립 120주년 기념식을 거행했다.

1903년 평양에서 개교한 숭의여학교는‘하나님의 의(義)를 높인다’는 건학 정신 아래 여성교육의 불모지에서 수많은 인재들을 길러낸 관서 지방 최고의 명문학교였다. 숭의여학교는 학교 이름대로 의를 실천한 사람들이 넘쳤다. 1913년 숭의의 기숙사에서 은밀히 조직된 송죽결사대원들은 조국과 민족을 위한 독립운동에 과감하게 몸을 던졌다. 이들은 3.1 운동 당시 태극기를 만들어 만세운동에 참여한 것은 물론 군자금 모집 등 적극적인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무임소장관을 지낸 박현숙, 한국 최초의 여류비행사인 권기옥 등은 숭의가 배출한 대표적인 여성 독립운동가들이다. 또한 숭의는 최초의 여류 성악가 윤심덕, 최초의 여성 문교부장관 김옥길, 소설가 강경애 등과 같은 선각자들을 길러냈다.

1930년대 중반부터 일제가 신사참배를 강요하자 숭의는 건학정신에 따라 끝까지 이를 거부하다가 1938년 3월에 자진 폐교하는 순절의 길을 택하면서 평양 시대의 숭의는 막을 내렸다.

현재 남산 숭의여대 전경.
현재 남산 숭의여대 전경.

해방 그리고 한국전쟁의 와중에서도 평양 숭의 동문들은 숭의의 재건을 위해 동분서주하며 온갖 노력을 기울였다. 결국 숭의학원은 1953년 6월 박현숙 여사의 주도로 서울 충무로에 있었던 송죽원이란 임시교사에서 감격스럽게 부활했다. 이후 일제의 정신적 심장부였던 남산 기슭의 경성신사 터로 이주해 신사 건물을 철거하고 학교다운 건물을 새롭게 짓고 입주하면서 숭의가 다시 한번 반석 위에 세워졌다.

1966년 숭의국민학교, 1971년 숭의여자전문학교, 1974년 전문학교 부설유치원의 교육기관이 신설되면서 남산의 숭의학원은 규모를 넓혀나갔다. 남산 시대의 숭의학원은 평양의 전통을 고스란히 이어받아 기독교를 모든 교육활동의 출발점으로 삼았다. 그리고 배구의 조혜정, 빙상의 김영희, 농구의 박찬숙과 같은 선수를 배출한 스포츠 명가로 이름을 높였을 뿐만 아니라 월드비전의 한비야 등 동문들의 사회적 활동도 활발했다.

유치원,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의 체제를 갖춘 숭의학원은 베이비붐 세대의 폭증과 산업화로 인한 대도시로의 인구 집중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었다. 이에 숭의학원 창립 100주년을 맞이한 2003년에 동작구 대방동에 부지를 마련해 숭의여자중∙고등학교를 신축 이전했다. 현재 대방동 숭의여자중∙고등학교는 직원들의 헌신적인 교육활동으로 지역에서 학부모들이 가장 선호하는 중심학교로 자리잡았다.

창립 120주년 기념예배.
창립 120주년 기념예배.

중∙고등학교가 빠져나간 현재 숭의 남산캠퍼스에는 넓고 쾌적하며 현대화된 교육시설 속에서 숭의여자대학교(부속유치원 포함)와 숭의초등학교 학생들이 꿈과 끼와 재능을 키워가고 있다.

과거 불안정했던 법인과 달리 현재의 학교법인은 1999년 이래 안정된 재정여건 속에서 평양 숭의여학교의 건학정신을 굳건히 하며 숭의의 정체성을 확고하게 지켜나가고 있다. 또한 120년을 흘러온 도도한 역사의 물줄기를 숭의학원의 고향인 북녘 땅 평양으로 이어야 하는 꿈과 사명을 간직하고 있다.

학령인구 급감과 디지털 대전환의 시대 속에서 숭의학원은 쇄신과 혁신을 통해 또 다른 차원의 도약을 준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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