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성호 한국인문사회연구소협의회 회장(순천대 인문학술원장)

강성호 한국인문사회연구소협의회 회장(순천대 인문학술원장)
강성호 한국인문사회연구소협의회 회장(순천대 인문학술원장)

세계적으로 격변하는 메가 체인지 시대에 변해야 살아남을 수 있다. 선진국에 진입한 한국에서 경제정책, 외교정책, 군사정책뿐만 아니라 학문정책도 고도화돼야 한다. 이같은 막중한 시기에 정부가 2024년도 R&D 예산안을 전년 대비 16.6%(약 5조 2000억 원)를 감액 편성해서 논란이 크게 일고 있다. 지금까지 계속 증가해왔던 R&D 예산이 처음으로 감소했을 뿐만 아니라 더 늘려야 할 시기에 거꾸로 줄였기 때문이다. 지난 반세기에 걸친 한국 발전의 주요 동력의 하나인 세계 2위 수준의 R&D 투자 기조가 근본적으로 뒤흔들릴 수 있다는 점에서 우려가 적지 않다.

최근 한국의 성장 동력이 위협받고 있다. 코로나 팬데믹 위기를 잘 극복하면서 따라잡았던 이탈리아 1인당 국민소득이 최근 한국을 2년 연속 추월했다. 2020년 한국의 1인당 국민소득이 3만 2930달러로 이탈리아(3만 2380달러)를 추월했다. 그러나 2021년 이탈리아(3만 5710달러)가 한국(3만 4980달러)을, 2022년에도 이탈리아(3만 7700달러)가 한국(3만 5990달러)을 2년 연속 따라 잡았다.

또한 성장하는 중국이 한국을 위협하고 있다. 2013년 628억 달러에 달했던 대중국 무역수지 흑자가 2022년과 2023년 연속 대중국 무역수지 적자로 전환됐다. 현대경제연구원은 대중국 무역수지 악화 원인으로 고위기술 제조업 흑자 감소와 저위기술 제조업 적자 확대를 들었다. 고위기술 제조업을 육성할 때만이 한국은 이러한 상황을 극복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사례들은 한국의 추격형 경제 모델이 한계에 도달했음을 여실히 보여준다. 지난 30년 동안 한국은 추격형 모델에 안주해왔다. 한국이 선도형 모델로 신속하게 전환하지 못하는 과정에서 중국을 비롯한 후발 국가들이 한국 시장을 빠른 속도로 따라 잡고 있다. 따라서 한국이 지속적으로 발전하기 위해서는 추격형에서 선도형 모델로 전환해야 한다.

한국이 선도국가가 되기 위해 필요한 원천 기술과 학문은 이제 자체적으로 투자해서 확보해할 수밖에 없다. 역사적으로 독일과 일본 등은 독자적인 중장기 발전전략을 통해 세계적 강국으로 부상했다. 독일은 19세기 후반 ‘학문형’ 대학 모델을 개발해 지속적 발전 동력을 확보했다. 일본은 19세기 후반 메이지 유신을 통해 국가 주도로 선진 구미 국가들의 학문과 기술을 체계적으로 받아들여 20세기에 동아시아 강국으로 자리잡았다. 한국도 이들 나라처럼 지속적으로 선도국가로 남기 위해서는 독자적인 중장기 발전 전략을 가져야 한다.

선도국가 전환에 필요한 원천 기술과 학문을 확보하기 위해 국가는 지금처럼 대규모 R&D 지원 정책을 유지해야 할 필요가 있다. 대규모 R&D 지원을 유지하면서, 선도국가가 되는 데 토대가 될 수 있는 기초과학과 원천 기술도 중장기적으로 같이 육성해나가야 한다.

세계 최상위 수준의 연구와 최상위 연구 인력을 지속적으로 확보해나가기 위해서는 정부가 선진국 수준의 고등교육 인프라를 구축해야 한다. 그러나 2023년 한국 고등교육 재정 규모는 대교협 발표에 따르면 15조 846억 원으로 GDP 대비 0.69%에 불과하다. 작년에 고등·평생교육지원특별회계법 제정으로 0.6%에서 0.69%로 늘어났지만, OECD 평균 GDP대비 1%에 비해 여전히 크게 미치지 못하고 있다. OECD 평균 1% 수준으로 올라가기 위해서는 향후 5년 동안 매년 2조 1979억 원을 투자해야 되는 실정이다.

고등교육 재정투자가 적다보니 한국 대학 경쟁력도 세계 최하위 수준이다. 한국의 학생 1인당 교육비는 2011년 OECD 32개 회원국 중 22위였고, 2019년에는 36개 회원국 중 30위로 바닥까지 떨어졌다. 국제경영개발대학원(IMD)이 2022년 발표에 따르면 한국 대학의 경쟁력은 63개국 중 하위권인 46위를 차지했다. 고등교육 투자가 한국의 4배 수준인 독일의 고등교육 경쟁력은 6위, 3배 수준인 미국은 16위였다. 이는 고등교육 투자규모가 대학교육 및 국가경쟁력에 곧바로 영향력을 미친다는 점을 잘 보여준다. 따라서 한국 정부는 성장동력을 다시 살리기 위해서는 고등교육에 대한 투자를 OECD 평균 수준이 아니라 독일같은 최상위 국가 수준으로 올려야 한다. 정부는 이에 필요한 예산 확보를 위해 통 큰 결정을 해야 한다.

또한 윤석열 정부의 ‘기초연구’ 지원에 인문사회 연구 지원을 포함해 인문학, 사회과학, 기초과학을 균형있게 지원해야 한다. 2022년 윤석열 정부의 인수위원회는 ‘기초연구’ 지원에 인문사회 분야를 포함해달라는 요청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윤석열 정부는 지금이라도 재검토하고, ‘기초연구’에 인문사회과학 분야를 포함해 중장기 지원 계획을 세워나가야 할 필요가 있다.

현재 한국 인문사회 분야 연구 투자 규모도 너무 적고, 그나마 비중도 지속적으로 축소되고 있다. 2021년 한국 공적 R&D 27조 3000억 원 중에서 2021년 교육부 인문사회 분야 총 예산은 2700억여 원으로 약 1%에 불과하다. 최근 5년(2016~2020) 동안 한국의 국가 R&D는 연평균 2.7% 증가했지만, 인문사회 분야는 연평균 0.3% 증가해서 인문사회 분야가 차지하는 비중이 지속적으로 작아지고 있다.

급격한 선진국 이행 과정에서 주기적 팬데믹, 기후이상, 에너지 자원고갈, 인구감소와 노령화로 인한 성장 동력 상실, 사회 불평등과 사회적 약자, 양성평등 문제 등이 한국 사회에서 본격적으로 대두되고 있다. 이러한 구조적인 국가‧사회적 문제에는 단기적 처방이 아니라 장기적이고 근원적 해결 방안을 제시해야 한다.

작년부터 한국인문사회연구소협의회가 국회 정책토론회와 자체 우수성과공유확산대회 기획 섹션에서 ‘인문사회분야 메가프로젝트’를 주장하는 것도 이러한 노력의 일환이다. 인문사회 분야 연구 지원은 소규모 지원이면 충분하다는 기존의 인식을 넘어, 한국사회의 주요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누리호’ 같은 초대형 연구 프로젝트가 인문사회 분야에서도 필요하다는 인식이 확산될 필요가 있다.

급변하는 변화 시기에 한국이 생존하기 위해서는 추격형 모델에서 선도형 모델로 전환해야 한다. 한국의 이공 분야와 인문사회 분야도 선도형 모델로 나가는 중장기 발전 전략을 자체적으로 모색해나가야 한다. 정부도 한국 학문이 빠른 시일 내에 선도형 모델로 전환할 수 있도록 연구 재정 투자를 대폭 늘려가야 할 것이다.

<한국대학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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