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형찬 수필가 겸 교육학자

백형찬 수필가 겸 교육학자
백형찬 수필가 겸 교육학자

철종은 안동 김씨 세력에 의해 왕이 된 임금이다. 강화에서 농사지으며 건강했던 몸은 궁궐 생활을 하면서 약해질 대로 약해져 서른셋이라는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철종은 영조, 사도세자, 정조, 순조, 헌종으로 이어지는 왕족 혈통의 마지막 인물이었다. 그런데 후사가 없었다. 이때 왕실이 찾아낸 사람이 바로 흥선대원군  이하응이었다.

‘대원군’이란 말은 왕위를 이을 적자 손이 없어 왕족 중에서 왕위를 이어받았을 경우 그 왕의 친아버지에게 봉하던 직위다. 흥선대원군은 왕실 최고 어른인 조대비의 허락 하에 어린 아들을 왕으로 세웠다. 대원군은 직접 왕위에 오르고 싶었으나 왕은 항렬을 따라야 했기에 어쩔 수 없이 둘째 아들을 왕으로 앉혔다. 그러고는 어린 임금을 대신해 섭정을 했다. 그 어린 임금이 바로 고종이다.

이하응의 호는 석파다. 대원군을 만나본 사람들의 이야기에 따르면, 그는 다섯 자 두 치의 키로 체구가 작았으나 원기가 있고 그 눈은 항상 번득번득해 보기에 무서웠고 형언하기 어려운 위엄이 있다고 했다.

역사 속에서 대원군은 정치가로만 부각되어 있지, 예술가로서의 모습은 잘 드러나 있지 않다. 그는 10여 년간의 집권기를 제외하면 나머지 시간의 대부분을 은거·유폐된 채로 살았다. 그 기간에 이하응은 수많은 난을 그렸다. 그의 삶을 전체로 볼 때 정치가의 삶보다는 예술가로서 삶이 더 길었다.

이하응은 추사 김정희의 제자다. 이하응이 추사를 찾아간 것은 추사가 제주 유배지에서 풀려났을 때였다. 그때 추사 나이가 예순넷이었고, 이하응의 나이는 서른이었다. 이하응은 추사의 화첩을 보면서 난치는 법을 배워 익혔다.

세상에는 이하응의 난초 그림이라고 하는 것이 많다. 그런데 적지 않은 그림이 가짜다. 이하응은 조선 말기 복잡한 정세 속에서도 난초를 그렸다. 서른 이후 난초를 그리기 시작해 세상을 떠날 때까지 그렸으니 거의 40년 이상 난초를 그린 셈이다. 그렇게 하다 보니 이하응만의 독특한 난초 그림이 탄생했다. 이름하여 ‘석파란’이다. 그의 호를 따서 붙였다.

이하응은 난초를 그리는 이유에 대해 “무릇 내가 난을 그리는 것은 천하의 수고로운 사람을 위로하기 위함이지 천하의 안락을 누리는 사람에게 바치려는 것이 아니다. 내가 난을 그리는 것은 안락하게 부귀를 누리는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다만 천하의 스스로 청빈함을 즐기는 사람을 위한 것이다”라고 밝혔다.

필자가 흥선대원군 이하응을 알게 된 것은 중학교를 막 졸업하고 나서였다. 인천에서 중학교를 다녔는데 서울에 있는 고등학교에 지원했다. 당시에는 고등학교 입학시험이 있었다. 그만 떨어지고 말았다.

그래서 영종도에 있는 용궁사라는 절에서 몇 달 동안 공부했다. 공부할 때엔 절에서 한참 떨어진 오두막에서 하고, 밥 먹을 때엔 절의 요사채로 올라와 먹었다. 요사채 툇마루에는 크고 멋진 현판이 걸려 있었다. 한자로 ‘용궁사(龍宮寺)’라고 새겨져 있었다.

주지 스님은 철종 임금 시절에 흥선대원군 이하응이 절에 왔다가 절의 전설을 듣고는 절 이름을 용궁사라고 정해주고 현판을 썼다고 설명했다. 현판에는 ‘석파(石坡)’라는 이하응의 호가 또렷하게 새겨져 있고 낙관 두 개가 위아래로 찍혀져 있다. 용궁사는 신라 원효대사가 세운 오래된 절로 수령이 1300년이나 되는 느티나무가 두 그루나 있다. 흥선대원군 이야기를 떠올리니 문득 용궁사가 그리워진다.

※ 참고자료 : 김정숙. 흥선대원군 이하응의 예술세계. 《일지사. 2004》

<한국대학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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