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기수 한양대학교 ERICA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박기수 한양대학교 ERICA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박기수 한양대학교 ERICA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설 연휴에 조지 밀러 감독의 <3000년의 기다림>(2022)을 봤다. <매드 맥스>에서 <꼬마 돼지 베이브>, <해피 피트>까지 하고 싶은 이야기를 종으로 횡으로 내달아 온 조지 밀러 감독인지라 더욱 기대됐다.

<3000년의 기다림>은 타셈 싱 감독의 <더 폴: 오디어스와 환상의 문>(2006)을 떠올리게 했다. <매드맥스>에서 거칠고 강렬한 스펙터클로 압도하던 조지 밀러 감독은 지극히 차분한 내레이션으로 속도감 있게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3000년의 기다림>에서는 <알리딘>에서 봤던 램프의 요정 지니가 등장해 <아라비안 나이트>의 세헤라자드처럼 이야기를 들려주다가 문득 ‘당신 마음의 갈망은 무엇이냐’고 묻는다. 지니는 누군가의 세 가지 소원을 들어줘야만 자유를 얻을 수 있는데, 각각의 어긋난 갈망으로 그러지 못했다는 점에서 결국 이는 지니의 갈망이나 다름없다. 지니가 겪은 3000년 동안의 고독과 갈망은 이야기를 듣던 알리테아에 전이되고 둘은 사랑에 빠진다. 하지만 지니를 살리기 위해서는 그를 놓아줘야 하는 딜레마 상황에서 알리테아는 ‘당신이 있을 자리로 돌아가라’를 마지막 소원으로 말한다.

이 작품은 스토리텔링 연구자로서 ‘이야기의 가치는 무엇일까’라고 스스로에게 되묻게 했다. ‘호모 나랜스’라고 쉽게 떠들지만 이야기의 가치가 무엇인지 혹은 무엇이 돼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자꾸 놓치게 된다.

적어도 콘텐츠와 관련된 이야기는 ‘가치 있고 즐거운 체험’이 돼야 한다. 이 말을 세 가지 관점에서 꼼꼼하게 살펴보자. 첫째, ‘가치 있다’라는 것은 삶에 대한 성찰이 가능해야 한다는 의미이며, 그 성찰의 내용이 누군가와 공유하고 싶을 만큼의 의미를 지니고 있어야 한다. 성찰은 스스로 살펴 삶에 도움이 될 수 있는 것이어야 하는데, 그것은 대부분 가치의 대립과 관계된 것이기에 전통적 이야기 문법에서는 ‘갈등’으로 표현돼왔다. 갈등에는 긴장감이 느껴지는 고민의 과정과 선택이 있어야 하고 선택된 가치의 미덕을 보여줄 수 있어야만 한다. 이것이 빠진 갈등은 단지 대립일 뿐, 의미 있는 성찰에 이르지 못하기 때문이다.

둘째, ‘즐거움’은 반드시 ‘가치 있는’과 연동되는 것이어야 한다. ‘즐거움’ 자체가 가치가 되기도 하지만 그때 그 즐거움은 반드시 지속가능한 것이어야만 한다. 말초적이고 공허한 즐거움은 휘발성이 강하기 때문에 이야기의 가치를 제대로 잡아두지 못하기 때문이다. 다만 최근 다양한 형태의 이야기가 개발되면서 ‘즐거움’의 영역이 개방적인 확장을 보여주고 있다.

셋째, ‘체험’은 향유 과정의 참여와 체험을 말한다. 향유는 주체적으로 작품을 즐기는 행위를 말하며 그것은 단지 작품의 속도를 따라가는 것뿐만 아니라 향유자의 향유 속도까지 포함한 과정이다. 최근 작품을 요약해 보여주며 유튜브에서 인기를 끌고 있는 패스트 무비가 아쉬운 이유다. 물론 콘텐츠 무한경쟁 시대에 재미있는 작품을 고르기 위해 패스트 무비를 보는 것이 잘못된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주체적 체험을 방해하는 것만은 분명하다.

언제든 어디서든 콘텐츠를 즐길 수 있게 된 것은 환영할 만한 일이지만, 양적 증가가 질적 향상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다양한 플랫폼을 통해 콘텐츠가 무한 제공되다보니 이제는 선택이 가장 중요한 문제가 됐다. 최근 콘텐츠 생태계를 돌아보면 개인별 취향을 반영한 알고리즘은 장르화를 강화시키고, 보고 싶은 콘텐츠보다는 봐야할 콘텐츠가 압도적이며, 대중성이 검증된 IP(Intellectual Property) 중심의 프랜차이즈화가 가속화되고, 원천IP로 웹툰과 웹소설이 선호되면서 그것의 이야기적 특성이 콘텐츠 전반을 지배하게 됐다. 그 결과 이야기는 장르 문법과 극렬한 자극, 그리고 이분법적 구도의 사이다 결말만 남음으로써 현실의 무게는 한없이 가벼워지고 사유의 깊이는 휘발되고 있다. 이야기는 범람하는데 정작 이야기다운 이야기는 부재하는 이율 배반적 상황이다. 콘텐츠의 근간이 이야기라고 할 때 텅 빈 이야기, 휘발성 강한 이야기로는 어떤 가치 있는 즐거움 체험도 기대하기 어렵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한국대학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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