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우 경인방송 대표이사

이기우 경인방송 대표이사
이기우 경인방송 대표이사

‘조선의 모파상’이란 별명과 함께 ‘한국 근대 단편소설의 완성자’라 칭송받는 명문장가 상허(尙虛) 이태준은, 그의 수필 《 조숙(早熟)》에서 이렇게 말했다. “일찍 익어 떨어진 배는 굳고 찝찝한 군물이 돌고 향기가 맑지 못하니, 사람도 이와 같다. 일찍 깨닫고 일찍 죽은 천재보다 70, 100에 이르기까지 그 총명, 고담(枯淡)의 노경(老境) 속에서 농익은 능금처럼 흠뻑 익도록 살아보고 싶다.”

지난 12월 18일, 서울문학광장 행사에 참여했다가 김형석 교수님을 뵀다. 1920년생, 이제 백다섯 살인 교수님은 중학교 급우였던 윤동주의 ‘서시’를 낭송했다. 그리고 앞으로 오 년의 시간이 더 주어진다면 음악을 즐기면서 보내고 싶다고 했다. 두 시간 반이 걸린 행사에 꼿꼿하게 앉아 계시던 교수님 모습에 고개가 절로 숙여지고, 백십 세도 거뜬할 듯싶었다.

그 일이 있기 며칠 전인 12월 5일, 김형석 교수님보다 열두 살 아래 아흔두 살(1932년생), 이길여 가천대 총장님을 뵀다. 이길여 총장님을 가까이에서 접하는 사람들은 누구나 그렇듯이, 나 역시 그분의 힘과 열정에 존경을 넘어 경이로움을 느낀다.

이길여 총장님은 스물여섯 꽃다운 나이에 척박했던 인천에 산부인과를 개업한 이래, 인천에서 가장 큰 가천대 길병원을 만들어 냈다. 또 네 개의 대학을 통합해 국내에서 몇 손가락에 드는 가천대를 세워냈다. 시대를 미리 읽고, 국내 최초로 학부에 AI(인공지능)학과를 개설하고 차세대 반도체 학과, 스마트시티융합학과 등도 과감하게 개설했다. 그뿐만 아니라 자신의 재산을 사회에 환원하기 위해 의료·교육·문화·봉사를 아우르는 국내 최대 공익재단을 설립한 바 있다.

필자는 2012년 한국전문대학교육협의회 회장으로 일하며, 이길여 총장님이 추진하던 대학 통합에 힘을 보탠 일이 있었다. 자신이 설립한 두 개의 대학과 인수한 두 개의 대학을 과감히 통합해 가천대로 출발시키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최근에서야 대학들이 뒤늦게 대학 통합들을 서두르고 있지만, 구성원의 반대는 물론 무수한 난제들이 있어 가장 다루기 어려운 일 중 하나다. 그러나 시대를 앞서 과감한 결단과 추진력으로 대학의 미래를 내다보신 이길여 총장님의 혜안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그분의 업적을 여기서 일일이 열거할 수는 없다. 많은 언론이 그분의 삶과 업적을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보다 더 중요한 게 있다. 바로 이길여 총장님의 철학과 삶을 대하는 태도다. 그 옛날 치료비가 없어 많은 사람들이 죽어가던 시대, 병원 문턱을 낮춰주기 위해 보증금이 없는 병원이라고 써 붙이고 밤을 새우며 24시간 환자들을 돌보던 의사. 서해 낙도를 배를 타고 다니며 진료하고, 소독하는 알콜이 차가울까 데워서 쓰던 의사… 지난 12월 5일 이길여 총장님이 인천시민과 함께 한 콘서트에서 하신 말씀을 새겨 보자.

“저도 하고 싶은 일이 많고, 여행도 가고, 친구들과 놀러 다니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단 1초도 그런 일에 시간을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 선택을 조금도 후회하지 않습니다. (중략) 인생은 나만의 것이기도 하지만 나를 둘러싼 가족, 이웃, 사회, 국가의 것이기도 합니다. 내 인생이 중요하듯, 다른 사람의 행복도 중요합니다. 친절하게 살아야 하는 이유입니다. (중략) 저의 소명은 사람을 살리는 일이었습니다. 사람이 태어나려면 수십만 정자가 경쟁을 뚫고 하나의 난자와 만나야 합니다. 이렇게 태어난 생명이므로 누구도 얼떨결에 인생을 보내면 안 됩니다.”

그러나 필자가 이길여 총장님을 특별한 존재로 생각하는 이유는 따로 있다. 뇌 교육의 창시이자 BTS가 졸업한 글로벌사이버대학교를 창립한 이승헌 총장이 쓴 책, 《나는 120살까지 살기로 했다》에서 읽은 문장들이 떠오른다. “자기 성장과 성숙, 그리고 완성에는 은퇴가 없다.” “목표한 꿈을 이루는 데는 120살도 부족하다. 그리고 그 꿈은 한 사람의 꿈이 아니라 지구에 살고 있는 우리 모두가 함께 꿔야할 꿈이다.”

이길여 총장님이 120세까지 사신다면, 앞으로 27년이 더 남아 있다. 현재의 체력과 운동능력, 활동력을 보면 충분히 그럴 가능성이 있다. 혹자는 ‘오래 사는 것이 그렇게 중요한가?’라고 물을지도 모르겠다. 이에 필자는 이렇게 답하고 하고 싶다. “이길여 총장님처럼 아흔두 살의 나이에 이토록 대담하고 건강하며 놀라운 활동을 하는 세계 여성 지도자는 없다. 그런데 우리는 그런 인물을 갖고 있다. 앞으로도 계속될 이 분의 활동을 통해, 한국은 세상에 다시없는 인물을 가진 나라가 될 것이다. 우리의 자존감은 물론, 국가의 품격이 높아지는 일이다.”

그 점에서 가끔 안타까울 때가 있다. 다른 나라, 다른 지역들은 이보다 작은 업적으로도 자신들의 인물을 세계에 자랑하는데, 우리는 이런 대단한 인물을 갖고도 겸손하려고만 하는가? 왜 작은 것에 눈을 두고, 크고 깊은 가치를 외면하려 하는가?

세계적인 존경을 한 몸에 받아 마땅한, 이길여 총장님의 백이십을 간절한 마음으로 기원한다.

<한국대학신문>

저작권자 © 한국대학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