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히 고등교육계에 ‘벽 허물기’ 열풍이 불고 있다. 윤석열 정부의 대학 재정지원 정책에서 ‘차별화’와 ‘벽 허물기’는 가장 중요한 키워드가 됐다.

이미 1차 글로컬 대학에 선정된 대학 대부분이 학과나 전공의 벽을 허물겠다는 혁신안을 제출했다. 미선정 대학들조차도 신입생 모집 단계부터 학과모집이 아닌 무전공제나 광역화 모집단위로 학생을 뽑겠다는 내용의 혁신안을 제출했다. 정부 정책 방점이 대학 내·외 ‘벽 허물기’에 꽂혀 있기 때문이다.

교육부는 지난 19일 발표한 2024년 글로컬대학지정계획(시안)에서도 “대학 안·밖, 대학 내부(학과, 교수)의 경계를 허무는 시도가 혁신적인가?”라는 데 주안점을 둔 평가기준을 제시한 바 있다. ‘2024년 교육부 주요 정책 추진계획 브리핑’과 ‘2024년 대학혁신지원사업 및 국립대학 육성사업 기본계획’에서도 ‘벽 허물기’가 중심에 있다.

교육부는 “지역과 대학 간의 벽을 과감히 허물어 동반 성장하는 혁신 생태계를 구축하겠다”며 “무전공 입학을 늘린 대학에게 더욱 많은 인센티브를 지원하겠다”는 입장을 알린 바 있다.

‘벽 허물기’ 정책은 이주호 부총리 겸 교육부 장관의 각종 행사 연설에서도 끊임없이 강조되고 있다. ‘융합인재 양성’이 절실한 상황이기에 ‘학과‧전공 간 벽을 허물고 학생들의 다양한 전공 선택 기회를 보장’하는 혁신이 필요하다는 입장이다.

한국대학교육협의회(이하 대교협) 총회 간담회에서도 이 문제는 총장들의 가장 큰 관심사였다. 이 부총리는 ‘무전공 입학’ 비율에 따라 인센티브를 제공하는 것이 사실상 대학의 선택을 강제한다는 주장에 대해 “학생들에게 전공 선택의 자유를 주지 않고 학생들이 제도에 묶이면 해결은 요원하다”며 “25%든 목표를 정해 정부가 인센티브를 주는 건 물러설 수 없는 원칙”이라는 점을 피력했다.

정부가 이렇게 강하게 나가니 대학으로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게 됐다. 웬일인지 고등교육정책에서 ‘벽 허물기’는 절대 양보할 수 없는 ‘금과옥조’가 됐다. 적어도 재정지원을 받으려는 대학은 서둘러 정부가 제시한 수준 25%를 충족시킬 수 있는 입시개편안을 만들어내야 한다.

그러나 ‘벽 허물기’ 정책이 현재의 고등교육 난제들을 모두 해결해줄 수 있는 만병통치약인가에 대해서는 아직 의견이 분분하다. 오히려 일각에서는 충분한 숙의와 타협 없이 정부재정지원과 연결해 일사천리로 추진하는 데 대해서 많은 이의를 제기하는 실정이다.

정부의 일방적인 ‘벽 허물기’ 정책이 성과보다는 오히려 기초학문과 인문학 소외를 불러 일으켜 학문 생태계를 붕괴시킬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되고 있다. 전날 발표된 대교협의 ‘대학 총장 설문 결과’에서도 가장 우려되는 부분으로 ‘학문 편중, 전공 쏠림 현상’이 꼽혔다. 

이미 입시에서 전체 대학에 무전공제를 적용한 대학도 있지만 성공 여부는 아직 미지수다. 여건과 특성이 서로 다른 대학에 일률적으로 비율을 정해 자유전공제를 밀어붙이는 정책이 창의 융합 인재 양성에 얼마나 효과적일지 궁금증만 더해 간다.

이미 대학별로 창의·융합인재 양성을 위해 학과나 전공을 초월하는 융합형 코스를 만들어 운영하고 있다. 부전공제나 복수전공제, 마이크로 디그리 과정을 개설해 운영하는 대학도 늘어나고 있다.

자유전공제로 입학한 학생들에 대한 지원 체제가 아직 갖춰져 있지 않아 자칫 신입생들이 방목상태로 방치될 것이란 우려도 여전하다. 현재로서는 일부 인기학과로 쏠림 현상이 있을 때 대처 방안도 마땅치 않다.

정부 정책에 맞춰 ‘벽 허물기’가 한창인 대학에서 “이렇게 하다가는 있는 대학이 허물어 지겠다”는 한탄이 나오고 있다. 통합을 전제로 글로컬대학에 선정된 대학 사이에서도 통합 형태나 조건 등을 둘러싸고 갈등이 깊어지고 있다는 소식이다.

이 시대 대학 내·외 ‘벽 허물기’를 통한 융합형 인재 양성은 필요한 일이긴 하다. 그렇지만 지금처럼 정부 주도하에 모든 대학들이 일사불란하게 ‘벽 허물기’에 나서는 것은 대학 특성화나 차별화에는 맞지 않는다.

제도를 바꾸고 정책을 구사하는 일은 조급성을 배제하고 신중하게 접근해야 한다. 하물며 미래인재 양성을 책임지고 있는 대학에 대한 정부 정책은 말해서 무엇하랴. 대학가에서는 오늘도 ‘이 광풍이 언제 지나갈까’ 하며 하루를 보낸다고 한다. 정책 당국자들이 깊이 새겨들을 말이다.

<한국대학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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