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상기 한국전문대학교육협의회 진학지원센터장

배상기 한국전문대학교육협의회 진학지원센터장
배상기 한국전문대학교육협의회 진학지원센터장

필자는 진로에 대한 고민으로 상담하러 온 청소년들에게 ‘진로 결정을 억지로 서두르지 마라’고 권고한다. 진로를 일찍 결정하면 좋은 점도 있다. 하지만 한 개인의 진로는 맞닥뜨리는 상황과 만나는 사람에 따라 달라지므로 개인의 의도보다는 우연에 영향을 받는 경우가 많다. 물론 학생부 종합전형으로 원하는 대학에 진학하기 위해 진로를 빨리 결정해야 한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다.

최근 정부는 대학에 ‘무전공 선발’을 주문하고 있다. 무전공 선발은 진로를 결정하지 않아도 실력만 되면 선발하라는 뜻이다. 또 많은 대학의 입학 설명회에서 제2, 제3의 전공을 할 수 있다고 한다. 어떤 대학은 입학 성적이 낮은 학과로 진학해 원하는 학과로 전과하라면서 자기 대학에 진학하라고 한다. 이는 고등학교 시기에 한 방향으로의 진로 결정을 억지로 서두를 필요가 없다는 점의 방증이기도 하다. 그렇다. 청소년 시기에는 배워야 하는 지식과 역량, 경험에 더 많은 에너지를 집중해야 한다. 억지스러운 진로 결정을 위해 무리할 필요가 없다.

얼마 전 서울 소재 명문 K대학 생명과학 전공으로 졸업을 앞둔 S군과 상담했다. 생명과학 연구원이 되기 위해 대학원에 진학하거나 선진국으로 유학을 가 컴퓨터를 전공하고 싶단다. 생명과학을 공부하다보니 컴퓨터의 필요성에 절감했고, 컴퓨터의 도움을 받으면 더 나은 연구를 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인공지능으로의 방향 전환도 고민하고 있다고 했다. 진로를 결정하고 진학했지만 대학을 졸업하기 전에 마음을 바꾸기 시작했다. 대학생들에게 흔한 일이다.

필자와 가까운 친지인 젊은 친구 A군은 미국의 스타트업 프로그램 매니저다. 초등학교 때 이민 간 A군은 이민자의 설움을 겪는 아버지를 보면서 공부를 정말 열심히 했다. 의대에 진학하기 위해서다. A군은 중학교, 고등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대학에서도 최고 우등상을 받고 졸업했다. 그리고 의대에 지원해 몇 개의 의대에서 합격통지서를 받았다. 의사가 되는 것은 부모의 꿈이자 자신의 꿈이 되었다. 왜 그런지 몰라도 A군은 의사가 되어야 한다는 사명감도 느꼈었다.

A군은 의대에 합격하고 나서 입학하기까지 빈 시간에 파트타임 일을 찾았다. 그러던 중에 어느 작은 스타트업 회사에서 일하게 됐다. 그가 맡은 일은 의대에 가기 위해 공부했던 것과 관계없는 컴퓨터 프로그램을 개발하는 일이었다. 그는 독학하면서 커뮤니티 칼리지에서 몇 과목을 공부하며 일을 해 나갔다. 그런데 의외로 재미있었고, 자신에게 잘 맞는다는 것을 알았다. 그런 가운데 그 회사에서는 A군을 고용하기를 원했고, A군도 그 일을 하면 인생이 재미있을 것 같아 의대를 포기하고 정규직으로 일하기 시작했다. 그때 A군은 20대 후반이었다.

미래가 보장되고 남들이 모두 부러워하는 의대를 포기하고, 작은 스타트업 기업에 입사한 것 때문에 부모와 친구들이 힐난했다. 그러나 A군의 의지는 강했고, 좋은 보수를 받으며 점점 중요한 직책을 맡게 됐다. 입사할 때 받았던 주식으로 많은 돈을 벌었고, 지금은 AI 분야로 박사학위를 취득하려 공부하고 있다. 필자는 A군을 만난 자리에서 의대에 진학하지 않은 것을 후회하지 않느냐고 물었다. A군은 이렇게 답했다.

“후회하지 않아요. 제가 의대에 갔다면 지금도 수련의 과정을 밟느라고 잠도 제대로 못 자겠지요. 그리고 제 보수가 보통 전문의보다 훨씬 많아요. 제가 받은 스톡옵션도 있어서 저는 앞으로 더 부자가 될 겁니다. 그때 의대를 가지 않은 것은 제 인생에서 신의 한 수 같아요.”

성공한 사람 대부분은 우연적 요소로 성공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자신이 의도한 것보다 공부하고 성장하면서 우연히 맞닥뜨린 환경에서 선택한 것에 최선을 다했기에 성공한 것이다. 진로는 상황에 따라 변하고, 청소년이 미래에 어떤 직업에 종사할지 모른다. AI의 영향으로 앞으로 어떤 직업이 나타나고 사라질지 알 수 없다. 그러므로 청소년 시절에 진로를 결정하는 데 너무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소비하지 말자. 현재 배우는 지식과 개인의 경험, 만나는 사람 등 모든 요소가 진로 결정에 영향을 준다. 자기가 지금 서 있는 곳에서 스스로 할 수 있는 능력을 키우자. 이것이 진로 결정을 서두르는 것보다 중요하고 시급한 일이다.

<한국대학신문>

저작권자 © 한국대학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