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보 걸러내는 엄격한 게시문화 정착해야


A대학 정문부터 중앙도서관까지 300미터 남짓한 길가에는 모두 40개의 현수막이 붙어 있다. 대학 공지사항이나 동아리 홍보 등을 알리는 현수막은 13개뿐이다. 유명 가수의 콘서트나 기업 홍보, 대학생을 대상으로 한 물품 판매 등 외부 현수막이 27개나 된다. 나무 사이에 흉물스럽게 걸쳐 있거나 늘어진 채 방치된 현수막도 곳곳에서 보인다. 학생식당과 중앙도서관 사이에 현수막 걸이대가 설치됐지만 무용지물이다.

학생식당 앞 게시판 역시 무법지대다. 응원단이 사용하는 전용 게시판을 제외한 게시판에는 형형색색 벽보들이 몇 겹씩 붙어 있다. 각 단과대 입구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각종 홍보 책자는 물론, 신문가판대에서 삐져 나온 신문들이 여기저기 널려 있다. 바라보는 학생들의 심기는 불편하다. 이 대학 도시공학과 재학생 김모씨는 “대학이 방치하다 보니 외부에서 아무나 들어와 홍보물을 붙이는 것 아니냐. 흉물스러워 볼 때마다 눈살을 찌푸리게 된다”고 말했다.


■ ‘불친절’ 게시물에 캠퍼스 몸살

A대학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대부분 대학이 게시물 홍수에 시달리고 있다. 학문의 전당은 각종 홍보물에 점령당한 지 오래다. 학생을 대상으로 한 행사와 각종 정보를 알리는 정체불명의 현수막이 무분별하게 캠퍼스 여기저기에 붙어 있으며, 신문가판대에는 불법 광고지가 수북이 쌓인 채 방치되고 있다. 심지어 학생들 눈에 잘 띄는 이른바 ‘목 좋은 곳’에는 붙인 홍보물 위에 다른 홍보물이 계속해서 붙는 등 매일 전쟁이 벌어진다. 게시판은 ‘홍보’의 기능을 넘어 ‘공해’가 된 지 이미 오래다.

문제는 보고 싶지 않다고 해서 보지 않을 수 없다는 데 있다. 유용한 정보도 아닌 홍보물을 매일 보는 일은 그야말로 ‘시각적 폭력’이라 할 수 있으며, 가히 ‘불친절한 캠퍼스’의 전형적인 사례로 볼 수 있다. 김인섭 숭실대 문예창작학과 교수는 이에 대해 “종이로 뒤범벅되고 천으로 늘어뜨려진 캠퍼스는 일견 활력 있어 보이지만, 매일 접하다 보면 답답함을 느끼게 되고 심지어 중압감마저 받게 된다”고 말했다.

물론 대학이 자체 규약을 정하고, 학생복지위원회 등을 통해 정화작업에 나서고 있다. 그렇지만 수많은 홍보물을 일일이 분류하고 처리하기에는 역부족이다. 떼면 붙이고 떼면 다시 붙이는 숨바꼭질은 오늘도 이어진다. 특히 학생들이 붙인 불법 게시물의 경우, 철거하면 항의가 빗발치기 때문에 외부 게시물만 제거하고 있는 상황이다. 대학 관계자는 “게시물을 일일이 제거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고 단속도 어렵다”고 밝혔다.


■ 무분별한 게시문화, 외국엔 없어

그렇다면 다른 나라도 우리처럼 매일매일 게시물 전쟁을 치르고 있을까. 미국 콜럼비아대에서 유학생활을 했던 한 학생은 “미국 대학에서는 현수막을 아예 찾아볼 수 없다”고 말했다. 여러 민족이 어울리다 보니 자국 학생을 위한 행사를 알리는 현수막이 내걸리는 경우가 간혹 있다. 그렇지만 게재되는 시기는 아무리 길어야 3~4일 정도에 불과하며, 장소 역시 학생문화관 앞 게시판으로 제한한다. 텍사스주립대는 학생회장 선거 때도 현수막이나 각종 홍보물을 사용할 수 없다. 광고나 선전물의 크기 역시 편지 규격으로 제한되고 현수막은 허락되지 않는다.

싱가포르 국립대 구내 학생게시판의 경우 게시판의 이용 용도에 따라 게시공간이 철저히 구분돼 있는 게 특징이다. 러시아 모스크바대에서도 요란한 벽보나 현수막 등은 찾아볼 수가 없다. 캠퍼스가 생활권과 어우러져 있는 영국의 대학에서는 일반 상가에 적용되는 엄격한 간판 규제를 당연시 여기는 의식이 보편화돼 캠퍼스에서 홍보물을 내건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다.

해외 대학들이 이처럼 온전하게 캠퍼스를 지켜 낼 수 있는 이유는 학생들이 자율적으로 규범을 지키기 때문이다. 스스로 규제하고 남을 최대한 배려해야 깨끗한 캠퍼스, 친절한 캠퍼스를 만들 수 있다. 물론 대학도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 인력이 적다는 핑계 때문에 학생이나 외부와의 마찰이 꺼려져서 피하고 방치한다면 대학은 온통 홍보물로 뒤덮이게 된다.


■ 멀티미디어 방식 도입 시급하다

그렇지만 우리의 대학문화에서 자율적으로 학생들이 법규를 지키길 바라기엔 분명 한계가 있다. 학생들의 의식이 어느 순간 바뀌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특히 최근처럼 대학생활이 취업과 직결되고, 이와 관련한 여러 정보들을 빠르게 받아들여야 하는 시점에서는 더더욱 불가능한 일이다. 수많은 정보들이 넘쳐나고 있기 때문에 분류 작업도 해야 하며, 대학은 이에 따라 지속적으로 관리 인력을 늘리고 오랫동안 캠페인을 벌여야 한다. 비용도 많이 들 뿐더러 오랜 기간이 소요된다.

게다가 대학생을 마케팅의 타깃으로 여겨 무분별한 홍보전도 벌어지고 있다. 결국 유익한 정보만 걸러서 학생들에게 맞는 정보만 친절하게 전해 주는 시스템 도입이 절실하다는 결론이 나온다. 한국대학신문이 지난 2007년 전국 27개 대학 재학생 1200명과 관계부서, 유관부서 등 교직원 54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캠퍼스 환경에 대한 설문조사에서도 이런 방안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았다. 조사 결과, 학내 구성원의 절반 이상이 ‘새로운 정비시스템의 도입이 시급하다’고 답했다.

현재 대학 내 게시물(현수막·포스터 등)에 대해 재학생과 교직원은 모두 ‘정비가 필요하다’(재학생 44.5%· 교직원 58.5%)는 의견을 갖고 있었으며, 현재 문제에는 공감한다고 답했다. 아울러 쾌적한 캠퍼스 환경을 마련하기 위해서는 학생과 교직원 모두 ‘정비시스템의 대안 마련’(학생 51.8%·교직원 42.8%)을 꼽아, 무엇보다 제도적 마련이 시급하다는 데 의견을 같이했다.

이에 대한 답은 역시 ‘디지털’로 귀결된다. 현재 게시물 문화를 개선하기 위해 멀티미디어 방식(인터넷 키오스크·LCD·LED전광판 등)을 즉시 도입해야 한다는 의견은 학생 73.1%, 교직원 81.0%로 매우 높게 나왔다. 지금까지의 게시판을 대체할 ‘특단의 조치’가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높아지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으며, 이제 멀티미디어에 눈을 돌릴 때란 뜻이기도 하다.



디지털 멀터미디어가 대안이다

캠퍼스의 게시문화가 바뀌고 있다. 후줄근한 현수막과 너덜너덜한 홍보 전단지는 사라지고, 첨단 디지털 멀티미디어가 속속 도입되고 있다. 한국외대는 지난달 용인캠퍼스에 인키(Internet Kiosk, In-Ki)와 LMB(LCD Media Board) 총 21대를 신규 설치했다.

인키·LMB는 학사·대학생활 정보 등을 제공하고 학내 현수막·벽보를 최소화해 깨끗한 캠퍼스를 구축하는데 기여하고 있다. 신정환 한국외대 홍보실장은 “서울캠퍼스에서 먼저 인키·LMB를 사용했는데 더 많은 학생들이 누릴 수 있도록 용인캠퍼스에도 인키·LMB를 신규 설치하게 됐다. 학생들의 반응이 매우 좋다”고 밝혔다.

지난 2007년 각 단과대와 주요 건물에 인키 27대, LMB 25대와 각종 홍보물을 정리하는 통합신문 배포대 21대를 설치한 한양대는 올해에는 교내 엘리베이터 내에 LCD 모니터를 설치하는 등 클린 캠퍼스 운동을 확대해 나가고 있다. 서울캠퍼스 62대, 안산캠퍼스 22대 등 모두 84대의 엘리베이터 LCD가 설치돼 가동 중이며, 지난해 6월에는 가로 6m·세로 1m 크기의 옥외 발광다이오드(LED) 전광판 3대를 주요 이동 통로에 설치했다. 신이식 한양대 학생처 계장은 “각종 게시물들이 사라지니 쓰레기 문제도 현저히 줄어들어 캠퍼스가 깨끗해졌다”고 말했다.

배재대는 2009학년도 총학생회장 선거에서 종이를 퇴출시켰다. 별도 홈페이지를 열어 후보자들의 약력·공약·정책 자료와 3분 분량의 홍보 동영상을 올렸다. 모든 선거운동은 온라인으로 제한됐으며, 선거 포스터도 지정게시판에만 한정시켰다.

염경철 인재육성처 학생복지과 학생생활계장은 “예전에는 후보들이 선거 포스터를 좋은 자리에 붙이려고 다투다 보니 대학 전체가 포스터로 도배되다시피 했는데, 온라인으로 선거를 하자 오히려 투표율도 올라가고 반응도 좋았다”면서 “다음 달 예정된 2010학년도 총학생회장 선거도 올해처럼 온라인으로 진행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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