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한경쟁의 공간일 뿐...삶의 방향 제시 못해”

대학교육의 문제점을 비판하며 자퇴한 고려대 김예슬씨에 이어 서울대에서도 한 학생이 대학교육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대자보를 붙였다.

서울대 채상원(사회과학대학 08학번)씨는 지난 29일 사회과학대학 건물 앞에 '오늘 나는 대학을 거부한다, 아니 싸움을 시작한다'는 제목의 대자보를 통해 대학교육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이를 바꾸기 위해 대학생들이 힘을 모으자고 밝혔다.

채 씨는 “초등학교 때부터 12년간 어른들이 우리에게 심어준 대학교에 들어가면 누릴 수 있다는 ‘자유’, ‘낭만’ 따위에 대한 환상을 가슴에 품고 묵묵히 내 친구를 밟고 올라서기 위해 노력해왔”며 “간신히 그 과정을 거쳐 대학교에 들어온 지금, 나는 우리가 어린 시절 가졌던 대학생활에 대한 환상은 그저 ‘환상’에 불과했다는 것을 깨닫는다”고 토로했다.

그는 “대학은 글로벌 자본과 대기업에 가장 효율적으로 ‘부품’을 제공하는 하청업체가 돼 내 이마에 바코드를 새긴다”며 “대학이란 곳은 본격적 무한경쟁의 닫힌 공간일 뿐이며 그 공간은 우리에게 그 어떤 삶의 의미도, 방향도 가르쳐주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채 씨는 대학교육이 “제2전공 의무화, 영어강의 확대, 상대평가제 등 (학생들에게) 더욱 많은 것을 강요하고 무조건 일렬로 줄을 세우는 것을 멈추지 않는다”며 “시대에 뒤떨어진 낡은 커리큘럼, 창의성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획일화된 교육방식에는, 대학생을 미래 사회의 주체로 보지 못하는 낙후한 교육관이 근본에 자리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그는 이어 “이렇게 낡고 답답한 대학에 우리의 미래가 있을까?”란 물음을 던지며 “우리 대학생들이 힘과 지혜를 모아서 수업내용과 수업방식에서부터 시작해서 병든 대학 사회의 본격적 수술에 나서야 한다”고 주장했다.

다음은 채상원씨의 대자보 전문.

오늘, 나는 대학을 거부한다. 아니, 싸움을 시작한다.

이것은 나의 이야기이지만 나만의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나는 25년 동안 경주마처럼 길고 긴 트랙을 질주해왔다. 우수한 경주마로, 함께 트랙을 질주하는 무수한 친구들을 제치고 넘어뜨린 것을 기뻐하면서. 나를 앞질러 달려가는 친구들 때문에 불안해하면서. 그렇게 소위 ‘명문대입학’이라는 첫 관문을 통과했다.“

이 또한 나의 적이지만 나만의 적은 아닐 것이다. 이름만 남은 ‘자격증 장사 브로커’가 된 대학. 그것이 이 시대 대학의 진실임을 마주하고 있다. 대학은 글로벌 자본과 대기업에 가장 효율적으로 ‘부품’을 제공하는 하청업체가 되어 내 이마에 바코드를 새긴다. 국가는 다시 대학의 하청업체가 되어, 의무교육이라는 이름으로 12년간 규격화된 인간제품을 만들어 올려 보낸다.”

얼마 전 고려대학교 김예슬 씨의 자퇴선언이 있었다. 혹자는 부적응자의 현실도피라 말하지만, 문제는 적응하지 못하는 개인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누구도 적응할 수 없는 현실의 구조 그 자체에 있다. 대학 거부라는 방법을 선택하지 않는 우리들도 잦은 회의감에 휩싸이며 때로는 현실에 타협하기도 하고 때로는 방황하기도 하며 살고 있지 않은가.

우리는 초등학교 때부터 12년간 어른들이 우리에게 심어준 대학교에 들어가면 누릴 수 있다는 ‘자유’, ‘낭만’ 따위에 대한 환상을 가슴에 품고 묵묵히 내 친구를 밟고 올라서기 위해 노력해왔다. 간신히 그 과정을 거쳐 대학교에 들어온 지금, 나는 우리가 어린 시절 가졌던 대학생활에 대한 환상은 그저 ‘환상’에 불과했다는 것을 깨닫는다.

오히려 대학이란 곳은 본격적 무한경쟁의 닫힌 공간일 뿐이며 그 공간은 우리에게 그 어떤 삶의 의미도, 방향도 가르쳐주지 않는다. 제2전공 의무화, 영어강의 확대, 상대평가제 등의 제도는 더욱 많은 것을 강요하고 무조건 일렬로 줄을 세우는 것을 멈추지 않는다. 전 세계를 강타한 경제위기를 그 어떤 주류 경제학도 설명하지 못하고 패닉에 빠진 마당에 대학은 별 고민 없이 지난 수 십 년간 사용해온 커리큘럼을 답습하고 있다.

이렇게 낡고 답답한 대학에 우리의 미래가 있을까? 무한경쟁의 쳇바퀴에서 오로지 앞만 보고 달려가지만 제자리에서 한 발짝도 나아가지 못하는 듯한 불안감, 가만히 있으면 남들에게 뒤쳐지는 것만 같은 불안감을 강요하는 이 대학에 우리가 상상한 대학생활이 있는가?

이 물음에 답해야 하는 사람, 대안을 만들 수 있고 만들어내야 하는 사람은 대학 교수님도, 정치인도 아니다. 바로 우리 대학생들이다. 우리의 삶을 그들에게 내맡길 수는 없다. 이에 나는 오늘 조용히 다짐을 해보려 한다. 자발적 퇴교와는 조금 다른 방법으로, 그러면서도 지금의 대학을 거부하기로. 대학의 주인이 되어 대학의 변화를 주도하기 위한 싸움을 벌이기로.

세상은 이미 변화의 물결을 타기 시작했다. 보수적 인사들이 아무리 사회주의적 발상이다, 포퓰리즘이다 해도 우리 국민 대다수는 이제 무상급식이 아주 상식적인 정책이고 필요한 정책임을 느끼고 있다. 체벌 금지, 보충수업 선택권 보장 등이 포함된 경기도의 학생인권조례가 입법예고 됨으로써 학생들의 인권이 충분히 보장되는 길로 나아가고 있다. 파이낸셜 타임즈는 이미 2007년에 “더 이상 세상은 평평하지 않다”고 선언했다. 이제는 세계화의 시대가 아닌 지역화의 시대라는 의미이다. 또한 자유무역도 그 수명을 다하고 보호무역이 힘을 얻을 것이라는 예측도 있다. 변화의 시기에 한국 사회와 대학은 여전히 철지난 신자유주의, 시장만능주의만을 외치고 있다.

격변의 시기, 아무것도 책임지지 않으면서 우리를 구속하는 대학 내의 모든 구습과 싸워야 한다. 경쟁 일변도의 신자유주의의 피해들이 더 이상 용인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을 뿐 아니라, 이 기존의 가치들이 더 이상 아무런 대안도 제시할 수 없는 상황이기에 이 싸움은 더욱 절실하다. 시대에 뒤떨어진 낡은 커리큘럼, 창의성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획일화된 교육방식에는, 대학생을 미래 사회의 주체로 보지 못하는 낙후한 교육관이 근본에 자리하고 있다.

새 사회의 동력을 창출할 수 없는 대학에서는 그 어떤 비전도 찾을 수 없다. 우리 대학생들이 힘과 지혜를 모아서 수업내용과 수업방식에서부터 시작해서 병든 대학 사회의 본격적 수술에 나서야 한다. 전체 대학 내 패러다임의 변화를 이끌고 대학생 스스로가 대학의 주인으로 거듭날 준비를 해야 한다.

김예슬 씨는 자보에서 대학과 자본의 거대한 탑에서 자신 몫의 돌멩이가 빠져도 탑은 끄떡없을 것이라 말했다. 그렇다면 이 탑을 반대하는 모든 우리 돌멩이들이 힘을 합쳐 흔들어보자. 그리고 우리들의 새로운 탑을 세우자. 시대는 더 이상 낡은 탑을 거부하고 새로운 탑을 요구하고 있다.

사회과학대학 08 채상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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