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선 본지 논설위원·충남대 언론정보학과 교수

조사로 쓸 한 글자를 고르기 위해 담배 두 갑과 하룻밤의 시간이 필요했다는 고백을 읽었다. 소설가 김훈이 쓴 <칼의 노래>는 ‘버려진 섬마다 꽃이 피었다’란 문장으로 시작된다. 바로 그 문장의 ‘이’와 ‘은’을 두고 벌어진 고민이었다. ‘꽃이 피었다’와 ‘꽃은 피었다’의 쓰임과 어감은 같지 않다는 것이다. 글자 한 자를 문장에 들어앉히는 데도 영육의 고통이 필요한 듯하다.

지난해 마지막 날, 방송통신위원회는 4개의 신규 종편사업자를 선정·발표했다. 조선·중앙·동아일보와 매일경제 등으로 우리나라에서 발행부수가 가장 많은 신문들이다. 한국ABC협회의 공식자료에 따르면 이들 신문은 하루 530여만 부를 발행한다. 그 소식을 접할 때 머리를 스친 한 문장이 바로 ‘누구를 위하여 종을 울렸나’였다. 종을 왜 울렸는지, 종은 왜 울렸는지, 종이 왜 울렸는지, 파상적인 질문들이 가지를 뻗어나갔다.

지난 20년 동안 서울방송(SBS)을 필두로 무수히 많은 신규 방송사업자들이 시장에 진입했다. 지상파 공영방송시장의 형태가 공민영 혼합구조로 바뀌는가 하면, 종합유선방송 (CATV), 위성방송, 이동멀티미디어방송과 IPTV 등 새로운 유료방송 매체들이 소비자들을 공략하기 시작했다. 그때마다 방송관련법을 제·개정해 사업자를 선정하는 절차를 밟았는데 이번처럼 법적 효력의 시비나 선정 절차상의 투명성 등이 문제되진 않았다.

국회는 종편 관련 법안을 날치기 처리했다. 절차적 위법을 조목조목 확인했으면서도 헌법재판소는 관련 법안의 유무효 판단청구를 기각해 버렸다. 국회가 ‘자율적’으로 알아서 해결하라는 주문이었다. 기특한 국회는 ‘알아서’ 법안의 보정을 깔아뭉개 왔다. 4개의 신규 종편사업자들은 절차상 위법한 관련법에 의거해 선정됐다는 태생적 한계를 안고 있다.

정작 문제는 종편 선정 후 더욱 심각하게 전개될 것으로 보인다. 방송시장의 구조와 상품의 특성을 감안할 때 미디어산업의 국제 경쟁력을 강화하겠다는 애초의 명분은 달성하기 쉽지 않을 것이다. 종편 사업자들의 시장 진입은 여론의 다양성 확대에 기여하기보다는 모기업인 신문의 논조를 방송 버전으로 확산하는 데 일조할 가능성이 크다.

방송광고시장의 거래질서를 규율할 미디어렙 법안이 국회를 통과하지 않은 상황에서 다수의 종편 사업자들이 선정됨으로써 전체 광고시장의 거래질서가 혼란에 빠질 가능성이 높다. 그동안 국민의 건강권을 보호하기 위해 규제하던 전문의약품의 방송광고를 허용해 달라는 요구가 벌써 쏟아진다. 미디어렙의 관장을 받지 않고 직접 광고영업을 하게 해 달라거나 방송과 인쇄미디어광고의 교차판매가 가져오는 시너지 효과에 주목해야 한다는 따위의 주장도 거침이 없다.

간신히 지역언론, 취약매체에 게재되던 광고물마저 저인망식으로 훑어 버릴 것이라는 우려도 크다. 신문시장의 ‘신문고시’처럼 ‘방송고시’ 제정운용이 필요할 것이라는 염려는 결코 근거없는 힐난이 아니다. 건전한 광고 거래질서의 붕괴는 민주주의의 혈액인 여론정보의 유통기반 파괴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광고주들이 일차 타겟이 되겠지만 ‘레드오션’의 무자비한 검투에서 검객들은 궁극적으로 시청자들의 평화스런 시청권을 베어 버릴지 모른다. 시도 때도 없이 불쑥불쑥 터져나오는 광고와 폭력을 수반한 선정적 프로그램들의 상시적 노출은 민주주의 시민으로서 시청자들의 정보소화 역량을 둔화시키게 될 가능성이 높다. 누구를 위하여 종을 울렸나.

전문가들은 다양한 시뮬레이션을 통해 연간 3000억원 내외의 광고판매를 해야만 종편사업자들이 생존할 수 있을 것으로 내다봤다. 우리나라의 연간 매체광고비는 8조원대에 미치지 못하고 방송광고 부문의 매출은 대략 2조5000억원 남짓하다.

올해 우리나라 전체 광고비는 3~5% 정도 늘어날 것으로 전망됐다. 한정된 방송광고시장에서 기존의 지상파방송사업자, 케이블사업자, 기타 유료방송사업자 그리고 새로 진입한 종편사업자들은 피가 터지는 처절한 싸움을 피할 길 없게 됐다. 생존에 실패할 경우 신문사업의 기반까지 휘청거릴 수 있다. 예측 불허의 방송시장에서 종은 왜, 종이 왜 울렸나? 국회와 정책당국은 답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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