숭실대 철학과 김선욱 교수

1월 8일, 3월 20일, 3월 29일, 4월 7일. 카이스트 학생들이 자살한 날들이다. 카이스트는 내 아들이 입시과정에 관심을 가졌던 학교이기에 죽은 학생들은 내 아들 같고, 그 부모들이 겪고 있을 황망함과 안타까움과 괴로움은 내 것 같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빌고 가족들에게 위로가 함께하길 기도한다.

카이스트의 서남표 총장은 세 번째 자살이 있은 후 “좀 더 많은 노력을 기울였더라면 소중한 생명을 잃은 비극적 상황을 피할 수 있었을 것”이라는 내용의 성명서를 발표했는데, 잉크가 채 마르기도 전에 네 번째의 자살이 발생했다. 그 직후 차등수업료제 폐지를 발표한 것을 보면, 이제야 학교 당국이 그 정책과 자살의 실질적 인과관계를 인정한 것으로 보인다.

상대평가 제도 아래서는 모두가 열심히 공부해도 일부 학생은 반드시 평점 3.0이하를 받게 된다. 차등수업료제의 취지는 명백하다. 강제력을 동원하여 학생들로 하여금 좀 더 학업에 열중하게 하고 좋은 성과를 내게 하려는 것이다. 이 제도는 서총장 체제 이후 시행된 일련의 개혁정책 가운데 하나이고, 개혁의 지향점도 학생, 교수 등의 탁월한 학문적 성과일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카이스트만의 목표가 아니라 현재 모든 대학이 내몰리고 있는 목표이기도 하다. 어느 대학이 이 목표로부터, 그리고 무한경쟁의 분위기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겠는가? 대부분의 대학들이 갖고 있는 발전계획의 기본 틀이 바로 그것 아닌가?

하지만 학문이란 게 그렇지 않고, 교육이란 게 그래서는 안 된다. 학문이란 말의 영어단어의 어원은 schol?이고 이는 여가, 한가라는 말이다. 학문은 깊은 사색의 바탕에서만 가능하며, 외부의 압박이 심하면 깊은 생각은 불가능하게 된다. 그래서 경제적 압박으로부터 자유가 학문의 첫째 조건으로 생각되어왔다. 우수한 학생에게 장학금을 주고 뛰어난 학자들에게 연구비를 주는 것은, 그들에게 공부와 연구에 집중할 수 있는 여유를 주기 위한 것이어야지, 결과물에 대한 비용처리는 아닌 것이다.

교육의 경우도 이렇다. 맹자는 교육에서 중요한 원리로 ‘돕지 않는 것’(勿助)을 주장한다. 싹이 자라나는 것을 도우려고 손가락으로 새싹을 조금씩 당겨주면 결국 그 싹은 죽어버린다. 당겨준 만큼 더 자라나는 게 아니라는 말이다. 사람마다 자기의 속도가 있고, 사람마다 꽃을 피우는 때가 다르다. 명문대라면 학생들을 뽑는 데는 엄격하더라도 일단 들어온 학생들에게는 보장된 장학금을 통해 안정적으로 대학생활을 하게하고, 자기 시간에 맞추어 깊어지고 성숙해질 수 있게 해야 한다. 그러나 카이스트에 부족한 것은 “좀 더 많은 노력”이 아니라, 스스로 커갈 수 있도록 내버려 두는 일이다.

카이스트가 채택했던 징벌적 수업료 개념은 장학금이 학점의 대가일 수는 있어도 학생들의 진정한 자기 개발을 위한 제도적 장치가 아님을 보여준다. 학생들의 자살은 외적 강제력에 내몰린 유능한 영혼이 죽음을 통해 자유를 얻으려는 최후의 선택이었다. 그리고 이 죽음이 모두 자살의 형식을 갖고 있지만 특정 제도와 실질적 인과관계가 있는 한, 이는 자살이 아니라 타살이고 우리는 여기에 대해 책임을 물어야 한다. 그런데 책임의 소재를 제도에 찾아서는 안 된다. 그것은 책임 회피일 뿐이다. 책임은 항상 사람에게 물어져야 한다. 이들 자살의 책임은 이 제도를 만들고 시행한 사람에게 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책임을 서남표 총장에게 물어야 한다.

아이들을 좌우를 돌아보지 않고 미친 듯이 질주하는 자동차로 만들어가는 대한민국 교육의 광란은 유치원에서 대학에 이르기까지 모든 교육 현장을 지배하고 있다. 이 광란을 멈추기 위해서라도 이 자살들과 카이스트의 무한경쟁을 부추기는 제도 사이의 인과관계를 분명히 인정해야하고, 서남표 총장은 사퇴를 해야 한다. 그리고 이를 거울삼아 이 땅의 수많은 대학의 발전계획에 담긴 무한 경쟁적 제도들을 근본적으로 고쳐가는 운동이 일어나야 한다. 자살이 어디 이들만의 문제였는가 말이다. 대학교육 전반에 대한 총체적 반성이 일어나야만 죽은 모든 이들의 넋과 그 가족들의 아픈 마음에 대한 진정한 위로가 가능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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