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년 만에 삭감된 R&D 예산…전년보다 15% 줄어든 26조 5천억
윤 대통령, “R&D 예산 대폭 확대, 혁신적‧도전적 R&D 전폭 지원”
대폭 확대된 글로벌 R&D 예산…국제협력 담당할 조직 필요성 제기
“후폭풍은 지금이 아닌 미래에 영향…대처 없으면 R&D 경쟁력 저하”

윤석열 대통령은 1월 5일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에서 개최된 「2024년 과학기술인·정보방송통신인 신년 인사회」에 참석해 연구개발(R&D) 예산을 확대하겠다고 말했다. (사진=대통령실)
윤석열 대통령은 1월 5일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에서 개최된 「2024년 과학기술인·정보방송통신인 신년 인사회」에 참석해 연구개발(R&D) 예산을 확대하겠다고 말했다. (사진=대통령실)

[한국대학신문 백두산 기자] “제 임기 중에 R&D 예산을 대폭 확대하고, 혁신적이고 도전적인 R&D는 돈이 얼마가 들어가든 전폭적으로 지원하겠다.”

윤석열 대통령은 지난 5일 오전 서울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에서 열린 과학기술인‧정보방송통신인 신년인사회에 참석해 이같이 밝히며, 연구개발(R&D) 예산을 확대하겠다는 의지를 드러냈다.

이는 지난해 정부가 R&D 예산을 삭감하는 과정에서 과학기술계가 강력히 반발하자 이를 달래기 위한 조치로 풀이된다. 윤 대통령은 “미래 세대 연구자들이 세계적인 연구자로 성장할 수 있도록 아낌없이 지원하겠다”며 “예산 문제는 정부에 맡겨 놓으시고 여러분은 세계 최고를 향해 마음껏 도전하시기 바란다”고 덧붙였다.

지난해 12월 과학기술정보통신부는 올해 정부 R&D 예산을 26조 5000억 원으로 확정했다. 과기정통부는 당초 정부안보다 6217억 원이 늘었다고 밝혔지만, 전년 31조 1000억 원보다 4조 5783억 원(14.7%)이 감소한 수치다. 정부 R&D 예산삭감은 33년 만이다.

이 때문에 과학계에서는 찔끔 증액해놓고 생색을 낸다는 분위기가 팽배하다. 과기정통부의 증액이라는 표현은 전년도 예산을 기준으로 한 것이 아니라 대폭 삭감하려고 했던 당초 정부안을 기준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과학계 관계자들은 R&D 예산삭감으로 인한 우리나라 연구 경쟁력 저하를 우려했다. 예산이 줄어들면 우수 연구진이 유출될 뿐만 아니라 학문후속세대 양성에도 영향을 끼치기 때문이다. 글로벌 R&D 확대에 대해서도 너무 급하게 진행된다는 반응을 보였다. 가이드라인 부재로 인해 각종 혼선은 물론, 한 기관에 여러 기관이 협력을 요청할 경우 우리나라 연구기관의 협상력이 약화될 것은 명확하기 때문이다.

■ 지난해 대비 12% 삭감된 과기정통부 R&D 예산 = 과기정통부는 지난 4일 ‘2024년도 연구개발사업 종합시행계획’을 통해 올해 R&D 예산으로 5조 8577억 원을 확정했다. 전년 6조 6726억 원보다 약 12% 삭감된 규모다.

2024년도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연구개발사업 분야별 예산 현황. (자료=과기정통부)
2024년도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연구개발사업 분야별 예산 현황. (자료=과기정통부)

종합시행계획에 따르면 과기정통부의 R&D 사업은 원천연구 3조 217억 원, 기초연구 2조 1289억 원, 인력양성 3342억 원, 사업화 2084억 원, 기반조성 1645억 원 등 과학기술분야에 4조 6909억원, 정보통신‧방송(ICT) 분야에 1조 1668억 원이 투입된다.

과기정통부에 따르면 올해 R&D 투자는 △혁신‧도전적인 R&D 추진 △과학기술과 ICT 기반으로 경제활력 제고하기 위한 분야 △디지털 핵심 원천기술 확보 △혁신 연구성과를 지역과 딥테크 산업화로 확산하는 분야 △미래사회를 대비한 글로벌 우수인재 양성에 대한 투자 등 다섯 가지 방향성을 갖고 있다.

혁신‧도전적인 R&D 추진을 위해 다양한 분야의 우수한 연구를 연구자의 성장 단계별로 지원하고, 젊고 유능한 연구자가 도전적 연구를 마음껏 수행할 수 있도록 신진연구자 대상 기초연구 투자를 강화한다. 이와 함께 국내 연구자가 세계 최고 수준의 연구기관과 함께 연구할 수 있도록 대규모 국제공동 연구‧인력교류 사업도 본격 추진한다.

과학기술과 ICT 기반으로 경제 활력을 제고하기 위한 분야에 대한 투자도 이뤄진다. 첨단바이오, 반도체‧디스플레이‧이차전지 등과 같은 주력기술, 양자기술 등 기술패권 경쟁에 대응한 전략기술 확보 목적의 R&D 투자를 강화하며 우주, 원자력 등 거대과학 분야에서 민간의 기술혁신 촉진 등을 위한 R&D 투자도 확대한다.

디지털 핵심 원천기술 확보를 위한 인공지능 기술과 차세대 AI반도체 기술, 6G 등 차세대통신 기술, 양자암호통신, 사이버보안 기술 등에 대한 투자는 물론, 미래 디지털 혁신‧유망기술 개발에 대한 투자도 강화한다.

또한 혁신 연구성과를 지역과 딥테크 사업화로 확산하는 분야에도 투자한다. 첨단과학기술 분야 공공연구 성과가 창업투자, 기술이전 등 과학사업화를 통해 미래 신산업으로 연결되도록 선도적 투자를 비롯해 우수한 ICT 연구성과가 기업의 기술혁신과 신제품‧신서비스 창출로 이어지도록 하는 기술개발 지원도 지속 추진한다.

이와 함께 미래사회를 대비한 글로벌 우수인재 양성에도 투자를 강화한다. 국가 전략 기술 분야 인력 수요에 대응하기 위한 12대 분야 석‧박사급 인재 양성, AI분야 석‧박사급 인재양성과 함께 디지털 신산업을 견인할 고급인재 양성을 목적으로 한 학‧석사 연계지원, 지역인재 양성 등도 추진한다.

아울러 세계 최초, 최고의 R&D를 지원하기 위한 제도 개선에도 나선다. 과학기술 분야는 평가 시 상피제의 원칙적 폐지, 도전성‧혁신성 지표 비중의 대폭 확대, 평가 종합의견 원칙적 공개 등 평가의 전문성과 투명성을 강화하기 위한 평가체계 개선방안도 수립한다.

■ 글로벌 R&D 예산 3배 이상 확대…“역선택 문제 발생할 수도” = 과기정통부는 지난 17일 올해 글로벌 연구개발 예산을 대폭 확대하고 ‘세계 최고 지향’, ‘국내 연구자와 글로벌 역량 강화’, ‘글로벌 스탠다드 생태계 조성’ 등 3가지 방향으로 추진하겠는 계획을 밝혔다.

2024년 글로벌 R&D 투자 포트폴리오. (자료=과기정통부)
2024년 글로벌 R&D 투자 포트폴리오. (자료=과기정통부)

이를 위해 글로벌 R&D 예산을 지난해 5075억 원 대비 3배 이상 확대했다. 국가전략기술 분야 글로벌 투자에 6883억 원, 기초연구 글로벌 전환에 8302억 원, 표준‧실증‧수출지원 등에 2981억 원 등 전체 R&D 예산의 6.8% 수준인 1조 8167억 원을 투입한다.

이종호 과기정통부 장관은 “2024년은 글로벌 R&D가 본격적으로 추진되는 원년”이라며 “글로벌 R&D가 차질 없이 이행될 수 있도록 R&D 시스템을 속도감 있게 혁신해 나가겠다”고 말했다.

글로벌 R&D 확대에 대한 기조는 명확하지만 아직 구체적 준비는 미흡한 것으로 보인다. 지난달 27일 과기정통부와 한국연구재단은 첨단바이오 분야 국내 연구자를 해외에 파견하는 인력교류 사업을 공고하면서 특정 교수들의 연구실과 교류할 것을 권장해 논란이 일어난 바 있다. 특히, 권장 연구기관 목록에 대한 근거도 밝히지 않아 과학계의 반발을 샀다.

수도권 대학의 한 교수는 “연구소도 아니고 연구자 이름을 특정한 것은 오해를 불러일으킬 소지가 있다”며 “해당 분야 다른 연구소나 관계자 입장에서는 이런 방식이야 말로 카르텔로 보일 수 있다”고 지적했다.

이에 대해 연구재단은 “내외부 전문가들의 의견을 취합해 만든 목록”이라며 “분야별로 관련 있는 외국의 우수한 연구자들을 참고하라는 의미로만 제시한 것”이라고 해명했다.

국회입법조사처 또한 일원화되지 않은 국제협력 체제에 대한 우려를 나타냈다. 국회입법조사처는 최근 발간한 ‘과학기술 국제협력 법제 진단과 제언’이란 보고서에서 “한국 여러 부처나 기관이 외국 유명기관에 경쟁적으로 손을 내밀면서 역선택 문제가 불거질 수 있다”고 지적했다.

보고서는 “현재 정부 발의안을 포함해 국회에서 논의 중인 관련 법령안이 범부처 차원에서 전략적으로 과학기술 국제협력을 추진하기 위한 공통 법안이 없거나 각 부처 소관 국제협력 업무와 범부처 차원 업무가 혼재돼 있다”며 “정부가 우수 연구진과의 협력(만)을 강조할 경우 (여러 부처나 기관이 상호 협의 없이 중복 협력 요청으로 인한) 역선택 문제가 더욱 심각해질 우려가 있다”고 설명했다.

보고서는 이에 대한 해결책으로 과학기술 국제협력의 범부처적 기획 조정 등을 추진할 (별도) 법률을 제정하는 방안을 검토할 것을 제시했다.

■ ‘예산삭감’ 후폭풍…연구계 “R&D 경쟁력 저하 불가피” = “연구실 생활을 해 본 연구자라면 알겠지만 R&D 예산 대부분은 인건비가 차지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R&D 예산삭감의 후폭풍은 결국 학문후속세대 이탈로 돌아올 수 밖에 없다. 한 번 축소된 연구가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려면 최소 몇 년은 필요하다.”

포닥(박사후연구원)을 거쳐 최근 임용된 한 교수는 본지와의 인터뷰에서 R&D 예산삭감이 가져올 후폭풍에 대해 이같이 말했다. “지금의 영향보다도 미래에 가져올 영향이 더 크다”며 “한 번 추진 동력을 잃은 연구를 정상 궤도로 올려놓는 일이 몇 배는 더 힘들다”고 토로했다.

이미 R&D 예산삭감의 여파는 연구계를 휩쓰는 중이다. 최근 한국연구재단은 대학 산학협력단과 개인 연구자에게 올해 연구비 감액 조정에 따른 과제 협약 변경 사항을 안내하면서 삭감된 예산을 통보한 것으로 알려졌다. 개인 기초연구 중 글로벌 리더 연구와 중견연구 등 ‘우수연구’는 10%, 기본연구, 생애 첫 연구 등 ‘생애기본연구’는 20%가 일괄적으로 삭감됐다.

이에 반해 올해 새로 연구 과제를 시작하는 ‘우수신진연구’는 2억 5000만 원까지 연구비를 지원하는 등 전체적으로 연구비를 크게 늘렸다. 해당 예산은 지난해 3159억 6000만 원에서 올해 4690억 3800만 원으로 늘었다. 즉 기존 연구에 대한 지원을 줄이고 새로운 연구에 대한 지원을 늘린 것이다.

과기정통부 예산은 인건비 지원을 통해 어느 정도 피해를 줄였지만 타 부처‧기관이 진행하는 연구 지원 사업은 여파가 컸다. 국가과학기술연구회(NST)가 주관하는 창의형 융합연구 사업은 예산이 반토막 났으며, 산업통상자원부를 비롯해 개별 부처가 지원하는 연구과제는 삭감폭이 더 큰 것으로 알려졌다.

이는 한국과학기술원(KAIST), 광주과학기술원(GIST), 울산과학기술원(UNIST), 대구경북과학기술원(DGIST) 등 4대 과학기술원도 마찬가지인 상황이다. 한 과학기술원 교수는 “인건비를 그대로 유지하면서 삭감된 예산으로 연구를 진행하려면 시약이나 재료 등을 사는 돈을 줄일 수밖에 없다”며 “실제로 연구에 쓰일 돈이 30~50% 가까이 줄어드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또 다른 과기원 교수는 “과기정통부에서 젊은 연구자에 대한 지원을 늘렸다고는 하는데 올해 선정될 연구자를 제외하면 이전에 선정된 연구자들은 일괄 삭감됐다”며 “주변에 연구를 하고 있는 연구자들의 사기가 말이 아니다. 첨단분야를 제외한 타 분야 연구자 중에는 이직을 고민하고 있는 사람도 많은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이어 “R&D 예산삭감의 피해는 생애기본연구에 해당되는 신규임용자나 젊은 연구자들이 지게 될 것”이라며 “빠르게 대처가 이뤄지지 않으면 국내 R&D 경쟁력 저하는 불가피하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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