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고·영재학교를 ‘의대진학 예비스쿨’로 왜곡시켜

[한국대학신문 이우희 기자] “과학고에서 공부 좀 한다 싶으면 다들 의대를 권하죠. 상위권 의대들은 우수한 과학고·영재학교 학생들을 수능도 안보고 경쟁적으로 채갑니다.”

교육부가 ‘공교육 정상화에 기여하는 대학입시’를 강조하면서도 정작 과학고와 과학영재학교를 황폐화시키고 있는 상위권 대학 의예과의 과학특기자전형에는 눈을 감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지난해 특기자전형 자체에 대한 특목고 특혜 논란이 불거졌지만 대학들이 특기자전형 모집인원을 축소하고 자격조건을 완화하는 선에서 논란은 일단락됐다. 하지만 공교육 악영향이 가장 크고 직접적인 의예과 과학특기자전형은 올해도 대부분의 대학이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이 전형에는 과학고와 영재학교에서도 수재들이 몰린다. 이같은 사실을 알고 있는 대학들은 사실상 공교육 붕괴를 방치하고 있다는 비난에서 자유롭기 힘들다.

■ 의대에서 왜 과학영재를 빼가나 = 2015학년도 의예과 입시에서 통칭 ‘과학특기자전형’을 운영하고 있는 대학은 연세대와 고려대, 성균관대, 중앙대, 이화여대 등 5곳이다. 특히 연세대는 전체 의예과 정원의 25%에 달하는 20명을 과학특기자전형으로 선발한다. 고려대도 지난해 기준으로 15명을 과학특기자로 뽑는다. 나머지 대학들은 5~8명 수준이었다. 이들 의대는 자연계열 최상위권이 몰리는 의대입시에서도 최상위권 그룹을 형성하는 의대들이다. 그만큼 우수학생 유치를 위한 경쟁이 뜨거울 수밖에 없다.

상위권 의대가 과학고·과학영재학교 학생들을 위한 특기자전형을 유지하는 이유는 이들 고교 출신이 자연계열 최정상이라는 점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과학고는 현재 전국에 20곳, 과학영재학교는 6곳이 있다. 보통 중2~중3 학생들 가운데 수학·과학에 재능이 뛰어난 학생들이 과학영재학교에 진학하고 탈락한 학생 일부와 나머지가 과학고에 진학한다.

특히 과학영재학교는 전국단위 모집인데다 중복지원이 없는 고교 입시에서 유일하게 별도 지원이 가능해 자연계열 최정상 영재들이 몰린다. 용인외고나 상산고 등 전국단위 자사고의 학생 상당수가 과학영재학교에 탈락한 경험을 갖고 있을 정도다.

때문에 과학영재학교와 수도권 과학고 학생들은 대학입시에서 ‘귀하신 몸’으로 대접받는다. 보통 서울대와 KAIST, 포스텍에 중복합격하기 때문에 대학을 골라서 진학할 정도다. 문제는 이들 학생들이 고교 설립목적에 맞는 자연대와 공대보다는 의대를 더 선호한다는 데 있다. 상위권 의대의 과학특기자전형은 이들의 의대진학을 부추기면서 결과적으로 과학영재 교육시스템의 붕괴를 촉진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 악순환의 고리··"이대로 두면 영재학교도 넘어진다" = 요즘엔 정말 과학자가 되고 싶어 과학고·영재학교 진학하는 학생들이 오히려 비주류에 속한다.

선호도와 실력면에서 최정상 영재학교로 평가받는 서울과학고의 경우 의대 진학자 수가 해마다 20명이 넘는다. 2009학년도 영재학교로 전환된 서울과고는 영재학교 원년인 2012학년 졸업생 97명 가운데 25명이 의대에 진학했다. 2013학년도에는 서울대 의대 10명을 포함해 모두 25명이 의대에 진학했다. 과학고는 더하다. 강남의 한 의대입시전문학원 강사는 “학원생들 대부분이 전국 과학고에서 난다 긴다 하는 학생들”이라고 전했다.

의대진학 열풍은 정상적인 과학교육의 파행을 부른다는 우려가 많다. 과학고·과학영재학교의 수업은 대부분 수학·과학 전문교과로 짜여있고 R&E수업과 논문작성 등으로 구성되기 때문에 학교는 이들에게 소모적인 수능 대비 공부를 따로 해주지 않는다. 상위권 의대들은 이점을 알고 오래전부터 과학특기자전형에서는 수능최저학력기준을 적용하지 않아왔다. 수능을 보지 않고도 의대에 갈수 있는 길을 열어준 것이다.

과학영재들이 특기자전형으로 합격하기 위해선 가장 중요한 것이 영재성 입증자료다. 의대에 진학하고자 하는 과학영재들이 국제올림피아드 수상에 목을 매는 배경이다. 실제 2007~2011년 국제화학올림피아드 은메달 이상 수상자 20명 가운데 14명이 의대에 진학했다. 화학과에 진학한 학생은 단 6명뿐이었다. 특히 2010년 이후 수상자들은 모두 ‘의치한’계열에 진학했다.

국제올림피아드 수상을 위해선 사교육이 필수적이다. 한 올림피아드학원 관계자는 “최소한 중학교 2학년 때부터 학원에서 올림피아드를 꾸준히 준비하지 않으면 고1~고2때 국제 올림피아드에서 수상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단언했다.

한 과학영재학교 3학년 부장은 “학교측의 배려 없이는 올림피아드 준비가 불가능하다”며 “정상적인 교육과정에 파행을 가져오는 원인이 된다”고 지적했다. 정부는 과학고가 지나치게 많이 생기고 입시기관화 되자 특별법을 제정해 영재학교를 설립했다. 이대로 두면 영재학교도 과학고의 전철을 밟게 될 것이란 우려가 나오고 있다.

■ “우리 대학으로” 이기주의 못버리는 대학들 ‥ 한양대 의대 결단 돋보여 = 일부 의대에서의 과학특기자전형 운영에 대해 문제될게 없다는 입장을 보였다. 고려대 입학처 관계자는 “모집단위 하나로만 볼게 아니라 전체로 넓혀보면 일반고와 특목고 전형이 형평성 있게 구성돼 있다”며 “특기자전형이 도입 초기에는 특목고를 위한 전형이었으나 지금은 일반고 출신 지원자가 30%나 된다”고 해명했다.

또 “지금은 서울대부터 앞장서서 특목고를 싹쓸이하고 있고, 연세대도 고려대보다 특목고 출신이 많다”며 “의대에서 특기자전형의 폐지를 논의한 적은 없다”고 말했다. 그는 “전형계획을 세울 때 전형마다 단과대학별 편제정원에 맞춰 모집단위 정원을 쪼개놨다”며 “의대의 특기자전형 정원을 따로 조정하거나 할 수는 없다”고 잘라말했다.

반면, 한양대는 의대를 포함해 거의 모든 모집단위에서 특기자전형을 폐지해 주목을 받고 있다. 배영찬 입학처장은 “과학인재 특별전형은 특목고 학생들에 유리한 것이 맞다”며 “때문에 올해는 특기자전형 정원을 전부 학생부종합전형으로 옮겼다”고 말했다. 그는 “특히 의대에서 과학특기자 전형 없애고 과학고 선생님들한테 비난을 많이 받았다”며 “기본적으로 모든 학생들에게 기회는 균등해야 하는데, 특기자전형은 아예 일반고 학생들에게 칸막이를 쳐버리는 제도”라고 지적했다.

교육부 대입제도과 최윤정 사무관은 “의대 과학특기자전형이 일반고 학생들을 아예 배제한다면 교육부가 법적으로 바로 제제할 수도 있는 상황이다. 하지만 실제 과학특기자전형을 보면 과학고 학생들만 100% 입학을 하진 않는다”며 직접적 제재에 어려움이 있음을 호소했다.

그러나 한 과학영재학교 교무부장은 ‘고교교육 정상화 기여대학 지원사업’을 통한 정부의 간접적인 접근방식이 실효성을 거둘수 있을지에 대해 의문을 표했다. 그는 “연세대나 고려대, 성균관대, 중앙대 같은 대학들이 돈 몇 푼이 뭐가 아쉽겠느냐. 고교 현장을 왜곡하는 입시제도를 운영하면 모든 지원금을 끊는 등 과감한 정책이 필요하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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