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기수 한양대 ERICA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박기수 한양대 ERICA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박기수 한양대 ERICA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몇 해 전 찾아간 리장고성(麗江古城)은 환했다. 낮에는 집집마다 걸린 꽃으로 환했고 밤에는 이채로운 조명이 불을 밝혔다. 커다란 몸집에 순한 얼굴로 느리게 오가던 리장의 개들은 그 환한 풍경이 깨질까 걱정하는 듯 짖지도 않았다. 리장의 나시족 사람들은 친절하고 온순했다. 더구나 음식은 우리를 배려하는 듯 우리 입맛에 딱 맞았다. 중국 특유의 향이나 강렬한 맛은 거의 없고 재료의 고유하고 풍부한 맛만 살렸으니 함께 간 학생들이 환호할 수밖에 없었다.

리장의 매혹적인 풍경을 볼 때마다, 맛있는 요리를 먹을 때마다 학생들은 자기들끼리 “개 멋있어!”, “개 맛있어!”라고 이야기했다. 그들이 말하는 ‘개’가 ‘매우, 정말, 최고’ 등의 강조를 의미하는 말이라는 정도는 이해하고 있지만 귀에 거슬리는 것도 사실이었다. 정색을 하고 이야기해서 고쳐질 일이 아니어서 장난스럽게 ‘개 금지령’을 내렸다. 고운 말이나 옳은 말 운운하며 당위적으로 요구를 하는 것보다 스스로 깨닫게 하려는 의도였다. 그렇다고 학생들의 ‘개’가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어서 압도적인 풍경이나 낯선 이국의 정취 앞에서 간간히 새어나오기도 했다.

거칠거나 경박하거나 상스럽다는 가치 판단보다는 눈길을 끄는 것은 그런 언어들이 자연스럽게 생성되고 통용되는 은폐된 의식 구조였다. 언어는 의식을 지배한다. 우리는 언어로 사고하기에 의식은 언어를 넘어서기 어렵다. 언어로 세계를 인식하고 사유하고 표현하는 까닭이다. 그래서 언어는 은연 중에 말하는 사람이 인지하지 못하는 부분까지 스스로 적나라하게 드러내기도 한다. 학생들은 왜, ‘개’를 대체할 수 있는 다양하고 풍성한 표현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모든 말에 ‘개’를 붙이는 것일까? 언어가 상스러워지고 경박해졌다는 섣부른 가치 판단으로 혀를 끌끌 차기 전에 생각해보자. 그 언어를 생성하고 소통하게 하는 사회문화적 맥락과 그것의 기저에서 암묵적으로 공유하고 있는 우리의 의식은 무엇일까?

언어의 힘은 구체성과 개별성에서 나온다. 맛있다고 굳이 표현하는 것은 그것을 구체화해 다른 체험과 구별해 기억하려는 노력이다. 어떻게, 얼마나 등 구체화 요소를 모두 빼고 ‘개’라는 말로 묶어버림으로써 강조만으로 구별하려는 시도다. 구체화가 세계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과 관찰 그리고 비교·대조의 치열한 과정을 통해 차별성을 지향하는 세계를 향한 원심적인 사고라면, 강조는 그 모든 것을 생략하고 강도만으로 구별하려는 자아를 향한 구심적인 사고라 할 수 있다. 전자가 갈등을 유발하고, 그것을 해소하는 과정에서 성장을 기대할 수 있다면, 후자는 그 모든 것을 자아로 수렴하는 까닭에 갈등은 피할 수는 있지만 그 이상은 기대하기 어렵다.

그래서 ‘개 맛있다’에는 강조는 있지만 비교가 없고, 타자를 향한 발화지만 타자는 없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벌어진다. ‘개 맛있어!’와 같은 의미로 많이 쓰이는 것이 ‘존맛’인데, 이것은 상태가 더 심각하다. ‘좋다’와 긍정적인 의미에 ‘좆’이라는 욕설적 의미를 발음상의 유사성을 활용해 ‘존’으로 묶음으로써, 욕은 아니지만 욕만큼의 강도와 세기를 만들어낸다. 그렇다면 ‘개’나 ‘좆’과 같이 그동안 말머리에서 욕설로 쓰이던 말을 굳이 강조의 의미로 쓰는 까닭은 무엇일까?

이러한 문제 제기는 일상 언어가 타락했다거나 어려졌다거나 거칠어졌다는 사실을 부정하려는 것이 아니다. 같은 맥락에서 그러니 순화해야한다는 것을 요구하기 위한 것도 아니다. 언어의 지배적 특성인 구체화와 개별화의 노력은 사라지고 있으며, 오직 강조만을 위한 센 강도의 말들만 난무하고 있다. 그 원인이 어디에 있든 상태는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하다. 구체화할 수 없는 언어라면 세계를 어떻게 인지하고 표현할 것이며, 개별화할 수 없는 언어라면 생산적인 소란과 다양한 관점은 어떻게 확보할 수 있겠는가? 쉽게 답을 찾을 수는 없겠지만, ‘개’와 ‘존’으로 대표되는 강도만을 요구하는 강조만으로는 매순간 삶이 빚어내는 생명의 역동과 낯선 세계의 경이를 잡아낼 수 없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 한국대학신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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