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가연 서라벌대학교 간호학과 2학년

김가연 서라벌대학교 간호학과 2학년. (사진=본인 제공)
김가연 서라벌대학교 간호학과 2학년. (사진=본인 제공)

한국전문대학교육협의회는 2022년 전문대 재학생들을 대상으로 그들의 이야기를 듣는 수기 공모전을 개최했다. 전문대학에 진학하는 학생들은 성별도, 나이도, 살아온 환경도 모두 다르지만 하나의 큰 공통점이 있다. 사회 근간을 이루는 전문 기술인으로 성장하겠다는 뜨거운 열정이다. 본지와 한국전문대학교육협의회는 공동으로 이 같은 열정을 독자들과 함께 나누고 삶의 동력과 영감을 이끌어내기 위해 공모전 수상자들의 이야기를 소개하고자 한다. <편집자주>

호텔항공관광외식학부에서 대학 시절을 보냈던 나는 남들이 부러워할 성적은 아니지만 취직하는 데 크게 지장은 받지 않았던 것 같다. 당시 특별히 하고 싶었던 것도 없었다. 호텔항공관광외식학부에서 공부한 내용으로 어디서든 써먹을 수 있고 어디서든 밥 굶지 않고 먹고 살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졸업 후에 생활비가 들지 않도록 본가 근처의 일자리를 알아봤었고, 그 당시 컴퓨터 자격증도 있었던 터라 종합병원 원무과에 취직하게 됐다.

나는 그걸로 만족했었다. 병원 냄새도 그다지 역겹지 않았고, 월급은 많지 않으나 집에서 왔다 갔다 걸어 다니기도 좋아 생활비도 별로 들지 않았다. 자주 오시는 외래환자분들과 반갑게 인사도 하면서 큰 병원은 아니었기에 위급한 상황도 없었다. 접수와 수납 중심으로 업무를 하고 환자들의 아픈 위치에 맞춰서 해당 과에 안내 정도 하면 되는 아주 만족스러운 삶이었다.

그런데 원무과장님께서 원무심사실에 자리가 비는데 거기로 옮겨서 일을 하라고 지시하셨다. 병원의 자세한 업무를 배운 적도 없고 거부했으나, “너는 잘 할 것 같다. 한번 해보자”라는 원무과장님의 말로 심사업무를 하게 됐다. 처음 접한 심사실은 서류들이 탑처럼 쌓여있고 모니터들은 주르륵 일자로 배치돼 있었고 몇 달 동안 일을 배우면서 청구심사업무에 정신이 없었다. 뭣도 모르고 시키니까 청구하고 작성하고 작업하고 하루 종일 모니터만 눈이 빠질 만큼 (모니터를) 봤었다가 생전 처음으로 머리에 쥐가 나는 것을 느꼈다.

이게 재미가 있다기보다는 하다 보니 알고 싶어지는 일이 많아졌다. 이 환자의 질병은 무엇인지, 왜 이 질병으로 이 약을 받는지, 단순히 처방에 맞춰 코드명이나 입력하고 서류들을 심사평가원에 넘기는 것이 아니라 환자와 질병에 대해 정말 알고 싶었다. 그땐 참 당돌했던 것 같다. 공부하러 가야겠다고 사직서를 바로 제출하고 간호대학을 가야겠다고 부모님과 상의했었다. 엄마는 간호조무사로 먼저 공부해 보고 정말 너의 길이라고 생각되면 꼭 대학에 보내주겠다고 말씀하셨다. 간호조무사 학원을 등록하고 공부하는데-정말 거짓 없이-공부가 이렇게 재미있게 느껴지는 건 처음이었다. 하지만 법 관련 공부는 흥미가 없었다.

어찌됐든 재미있게 공부를 하니 간호사 선생님들 눈에 띄었고, 병동 임상에서 근무하는 수간호사님 중 한 분이 내게 실습을 자기 밑으로 왔으면 한다고 말씀해주셨다. 수간호사 선생님은 실습 때에도 따로 공부할 수 있는 자료들을 준비해 주셨고, 병동에서 실습하는 것이 아닌 언제든지 바로 일할 수 있는 간호조무사로 나를 가르쳐 주시고, 바늘도 정말 잘 다룰 수 있게 나를 도와주셨다. 덕분에 간호조무사 시험도 한 번에 붙을 수 있었고, 일하는 것도 잘 적응해서 환자며 직원분들이 간호조무사인지 모를 만큼 열심히 재미있게 일했었던 것 같다. 지금 생각하면 정말 좋은 분들을 많이 만났던 시기다.

‘태움(간호사들의 직장 내 괴롭힘)’이라는 것이 심한 간호과에서 그런 것도 못 느낄 정도로 수간호사 선생님의 그늘 아래 모든 선생님들에게 배움을 얻었으니 말이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다보니 무언가 갈증을 느꼈다. 진짜 간호사면허증을 갖고 싶었다. 내가 아무리 노력해도 간호조무사로서는 한계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선택한 게 대학 진학이었다. 과감하게 대입을 치렀고 합격 연락을 받았다. 그때 나이는 25살이었다. 하지만 대학에 갈 수 없었다. 나와 연년생인 남동생이 군대를 마치고 복학하던 때였다. 집에서는 여러 부담으로 인해 부모님은 내게 대학을 미루면 안 되겠냐고 하셨다.

그땐 모아둔 돈으로 학교만 다닐 수 없는 형편이었기에 참 많이 울었던 것 같다. 대신 계약직 간호조무사로 대학병원으로 이직을 했었다. 나는 그곳이 정말 궁금했고 엄청 많은 과를 가진 병원은 어떻게 일하고, 직원들에게 어떤 복지들이 있는지 진짜 알고 싶었다. 원장님들이 아닌 의사 교수님들을 상대하는 건 정말 설렜었던 것 같다. 그러나 그곳은 생전 처음 겪어보는 차별이 있었던 것 같다. 간호사들과 의사들 사이에 간호조무사는 어떤 사람인지, 겪어보지 못한 이들은 잘 모를 것이다.

그래도 참 좋았다. 부모님들이 어디 가서 자랑하는 것도 처음 봤고 할머니가 위독하셔서 내가 다니는 병원에 입원하시다가 돌아가셨는데 장례식장도 병원에서 다 해결해줬고 직원 할인이 그렇게 도움이 많이 되는 걸 처음 알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간호조무사로서 대학병원에 근무하는 게 너무 싫었다. 나는 계약직을 만료하고 호주로 유학을 다녀온 소꿉친구의 권유로 기약 없이 떠날 준비를 했다. 워킹홀리데이비자가 뭔지도 모르는 내게 친구는 확신한단다. 너라면 그곳에서 정말 잘 할 수 있을 것이라고. 그때는 무슨 자신감이 들었는지 모르겠다.

벌어 놓은 돈으로 혼자서 필리핀 장기 어학연수를 먼저 했었고, 겁도 없이 구석구석 배낭여행도 하면서 호주로 갔다. 호주로 가는 비행기에선 냄새부터가 달랐다. 눈 색깔도 노랗거나 파랗거나 이질적이었다. 나의 키가 172cm로 작은 키도 아닌데 거기선 그냥 평범한 키였다. 영어 발음도 혓바닥이 얼마나 잘 굴러 가는지, 분명 기본영어는 배우고 갔는데 정말 신기했었던 기억이 난다. 당시 27살, 호주에 가서 깨달은 바가 있다. 여긴 전 세계의 날고뛰는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라는 걸…

지금 생각하면 천운이 따랐다. 해외에 가서 직장도 구하고 자리잡을 즈음에 전 세계를 뒤덮은 육지같은 이 섬나라 호주까지도 그것이 올 줄 몰랐다. 그것은 ‘코로나 바이러스’였다. 호주에 온 지 얼마 되지도 않았고, 배낭여행을 하느라 경비도 많이 썼는데 설상가상으로 항공권은 급상승했다. 나 같은 사람은 살 수도 없는 금액까지 올랐다. 달러를 벌어 한국에 보내주고 있는데 말이다. 한국은 전세기에 내 자리 하나 줄 마음이 없어 보였다.

엄마는 더욱 심했다. 죽어도 거기서 죽으란다. 한국에 오지 말라고 했다. 호주도 상황이 정말 좋지 않은데, 전화조차도 안 받으셨다. 얼마나 서러웠는지 모른다. 어리숙하게 사람을 잘 믿는 나는 사기까지 당해 통장에 2000불쯤 남았던 것 같다. 시티(City)는 락다운(Lock down)되고, 일하던 곳도 문을 닫고 시티가 닫히니 공장도 사람을 필요로 하지 않아 갈 곳은 딱 하나였다. 농장밖에 없었다. 그래도 농장 일이라도 해서 돈을 벌 수 있는 게 얼마나 감사한지 몰랐다. 호주에 오기 전, 딸기밭에서만 뒹굴다가 한국 오고 그러지 말라고 친구들이랑 우스개소리로 하던 게 현실이 됐다.

처음에는 각 나라의 친구들도 조금만 버티면 코로나가 끝날 줄 알았다. 하지만 한 달이 지나도 코로나는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고, 일도 힘들고 자기 능력만큼 버는 곳이 농장인지라 떠난 사람들이 많아지기 시작했었다. 그래도 그중에 긍정적 마인드를 가진 친구들이 있었고 나에게 ‘존버(끝까지 버틴다는 뜻의 비속어)’하자고 했다. 그때 처음 배웠다. 그래서 나는 존버정신을 기회로 삼았다. 남들 돈까지 다 심고 다 딴다는 생각을 했다. 플랜트를 심어서 커팅도 하고 딸기꽃 피는 것도 보고 다른 열매들 수확도 해보고 딸기 포장도 해보고 일도 너무 잘했나 보다. 텃세가 심한 유럽 애들을 다 제치고 매니저까지 했었으니 말이다.

딸기 시즌이 끝나고 호주는 한국보다 일찍 위드코로나로 전환돼 다시 시티에서 생활했다. 29세 가을, 동생이 취업 준비를 다 끝내더니 바늘 구멍을 뚫어 공기업에 합격했다. 부모님은 나에게 이제 너 하고 싶은 거 하라고 했다. 호주에서 공부하고 싶으면 호주에서 공부하고, 한국에서 하고 싶으면 한국에서 하는 걸로 나를 응원해 줬다.

나는 가족들과 나의 친구들 곁에서 못다 한 간호학 공부를 더 하고 싶어서 지난해 1월, 내 나이 30세에 집에서 가까운 간호학과에 원서를 넣고 면접을 위해 한국에 들어왔다. 면접 당시 교수님들의 긍정적인 답변을 얻고 다시 호주로 갔다. 일도 마무리하고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3년 가까운 시간을 정리하고 돌아왔다. 1학년 1학기 때는 한 풀면서 공부를 했다. 그랬더니 성적을 떠나, 비록 학교생활이 낯설었지만 정말 재미있었다. 2학기인 현재는 중간고사 치는 날도 그냥 행복했다.

이제는 어떠한 아르바이트도 하지 않고 공부에만 전념하면서 다양한 연령층의 사람들과 함께 간호학과에 다니고 있다. 생명에 대해 공부하는 지금, 내가 왜 그렇게 돌고 돌아 이제야 간호학을 전공할 수 있게 됐는지 알게 됐다. 아무런 경험도 없이 바로 간호학 공부를 했었다면 어땠을까. 난 이러한 배움의 가치도, 생명의 소중함도, 다양한 인종도 나와 같은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또 한편으로는 열심히 노력해서 어느 누가 봐도 취직을 잘 해준 동생에게 고마움을 느낀다. 오늘(2022년 10월 25일) 환갑을 맞이하면서 건강하게 일하시는 아빠께, 요양원에서 어르신들 돌보는 게 행복하다는 엄마께도 이 글을 빌어 감사의 인사를 드린다. 

<한국대학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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