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상훈 성균관대 교수(교무처장)

최근 기업과 지자체뿐 아니라 교육계에서도 ‘디지털 배지(Digital Badge)’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다. 디지털 학습 이력과 경력을 증명하는 디지털 배지를 도입하고자 하는 대학들이 늘고 있다. 해외에서는 이미 디지털 배지가 활발하게 사용되지만, 국내에서는 아직 도입 초기라는 점에서 활성화를 위한 더욱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 이에 본지는 디지털 배지 도입에 앞서 연재기획 ‘디지털 대전환 기획 시리즈’를 준비했다. 연재기획을 통해 전문가 시각에서 디지털 배지의 글로벌 표준 정립, 학생 관점의 디지털 이력 관리 중요성을 살펴보고, 향후 흐름을 조망하고자 한다. [편집자주] 

■ 연재 순서        
① 배상훈 성균관대 교수(교무처장)
② 장상현 한국교육학술정보 교육데이터센터장
③ 노원석 레코스 대표
④ 홍정민 휴넷 L&D연구소장        
⑤ 조훈 전문대교협 국제협력실장        
⑥ 이상범 교육부 전(前) 중등직업교육정책과장        
⑦ 전문가 좌담회

배상훈 성균관대 교수(교무처장)
배상훈 성균관대 교수(교무처장)

대학은 무얼 하는 곳인가. 자라나는 청년들이 미래 삶이나 직업 세계에서 활용할 수 있는 지식과 기술 그리고 우리 사회의 건강한 구성원으로 성장하는 데 필요한 역량과 태도를 배우고 익히는 곳이다. 그 내용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것이 교육과정이고, 교수의 역할은 학생이 ‘배워야 할’ 내용을 효과적으로 ‘전수’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환경이 변했다. 무엇보다 졸업 후 맞이할 삶과 직업 세계의 양상이 바뀌었다. 미래 사회가 요구하는 역량도 달라졌다. 새로운 지식이 매일 같이 쏟아져 나오고, 학교에서 배운 것이 졸업 후면 낡은 유물이 될 수도 있다. 심지어 미래는 누구도 예측하기 어려운 ‘불확실성의 시대’라고도 한다. 대학은 인류 사회에서 오랜 기간 축적된 지식의 ‘정수(精髓)’를 전수하는 곳이지 변화무쌍한 사회 요구를 따라가는 곳이 아니라는 주장이 있고, 일리가 있는 말이다. 하지만 학생 성공(student success) 관점에서 볼 때, 대학이 학교 밖 변화와 미래 세대의 요구를 도외시하고 상아탑에만 머무르는 것은 교육기관으로서 책임을 저버리는 것이다.

환경이 변하는 만큼 대학도 변해야 한다. 변화의 시작은 대학의 가치와 역할이 학생 성공에 있음을 깨닫는 것이다. 그렇다면, 학생이 보람찬 대학 생활을 하고 졸업 후 원하는 성취를 이룰 수 있게 하려면 무엇을 해야 할까. 그것은 교육적으로 의미 있는 경험을 풍부하게 제공하는 것이다. 교육학자 존 듀이(John Dewey)도 학생의 성장과 발전에 이바지하는 교육적 경험을 체계적으로 제공하고 안내하는 것이 교육자의 역할이자 책무라 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학생이 대학에서 가져야 할 경험을 교과서에 나오는 지식을 배우는 것으로 한정하면 안 된다는 점이다. 학생은 수업만으로 성장하지 않기 때문이다. 캠퍼스 안팎에서 이뤄지는 공모전, 방학 중 이뤄지는 팀 프로젝트, 해외 탐방, 지역사회 봉사, NGO 활동, 인턴 등에 많이 참여할수록 더욱 다양한 경험을 하게 된다. 이러한 경험을 통해 지적, 정서적, 사회적으로 더 성장할 수 있다. 학자들은 이런 프로그램을 ‘고효과 프로그램(high impact practices)’이라고 하는데, 학생 성공을 위한 자양분이 된다.

흔히 비교과 프로그램으로도 불리는 고효과 프로그램은 자발적 참여 아래 이뤄지므로 학습 몰입도가 높다. 정규 수업과 달리 학점에서 벗어나 다양한 시도를 할 수 있고, 실패에 대한 부담도 적다. 게다가 대학생들은 입시 준비에 얽매였던 고교 시절에 비해 시간적 여유가 많은 편이다. 따라서 의지만 있으면 원하는 만큼 다양한 경험을 할 수 있다. 오늘날 교육자의 역할이 ‘지식 전수(teaching)’에서 ‘학습 큐레이션(coaching)’으로 바뀌는 것도 이런 맥락에서다.

학생에게 교육적으로 유익한 경험을 풍부하게 제공하는 것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그들이 겪은 경험과 성취를 잘 기록해서 다음 단계 진학이나 취업 등에 활용하도록 하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서 정부는 중요한 정책을 내놨다. 이는 정부가 추진할 국정 과제에도 포함되었는데, ‘교육·경험·자격 이력 누적을 위한 디지털 배지 부여’와 ‘학생의 진로 탐색부터 학습 이력-취업경력까지 관리가 가능한 개인별 포트폴리오 구축’이 그것이다.

지금까지 학생이 대학에서 이룬 성취를 보여준 것은 ‘성적 증명서’였다. 여기에는 학기별로 수강한 교과목명과 학점이 표시된다. 일부 대학은 학점 외 봉사 활동이나 특정 자격의 이수 여부를 추가하기도 한다. 하지만 한두 장의 종이 문서로 보여주는 성적 증명서로는 학생이 대학에서 가진 다양한 경험을 충분히 보여주지 못한다. 우선 내용상 정규 수업에서 거둔 학업 성과에 초점을 둘 뿐, 다른 활동에 참여해서 얻은 경험이나 성취를 담지 못한다. 학생의 성취를 보여줄 때도 합격 여부나 알파벳 등급으로 나타내는 학점 같은 최종 ‘성과’만을 보여준다. 학생이 구체적으로 어떤 활동을 했고 그 결과 어떤 역량이 길러졌는지, 이를 위해 어떤 과정을 거쳤는지에 관한 ‘과정’을 입체적으로 보여주지 못한다. 종이 문서로 출력되어 위변조가 상대적으로 쉽고 정보보호 차원에서도 한계가 있다.

이런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대안의 하나가 ‘오픈 배지’다. 오픈 배지는 학생이 참여한 프로그램이나 활동의 개요, 주요 내용과 과정, 그 결과로 얻은 성취나 역량에 관한 정보를 인증해서 보여주는 디지털 도구다. 프로그램 제공자가 해당 프로그램을 성공적으로 이수한 학생에게 배지 이미지를 가진 ‘디지털 배지’의 형태로 제공하는 경우가 많다. 디지털 배지는 인터넷만 연결되면 언제든지, 세계 어디라도 보내서 자신의 검증된 활동 이력과 성취를 공유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범용 블록체인 인프라를 활용함에 따라 통용성 못지않게 보안성도 높다.

요컨대, 오픈 배지는 교육 프로그램 제공자가 학생의 참여 이력과 성취에 관한 정보를 디지털화한 배지 이미지에 담아서 발행(issue)하는 증명이고, 학생은 이를 활용해 자신의 교육 활동 이력과 성과를 체계적으로 기록하고 보관(host & archive)할 수 있다. 나아가 누구든지 해당 학생이 보낸 디지털 배지를 클릭함으로써 그 학생이 거친 활동과 성과를 확인할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 디지털 배지의 활용은 아직 걸음마 단계다. 하지만 세계 유수 대학과 구글, IBM 같은 다국적 기업들은 이미 널리 사용하고 있다.

디지털 배지는 ‘학습자 지갑(learner wallet)’과 함께 활용함으로써 교육적 효과를 더 높일 수 있다. 학습자 지갑은 학생이 각자 받은 배지를 보관하고 공유할 수 있는 디지털 플랫폼이다. 디지털 배지가 ‘스펙(spec)’이라면 학습자 지갑은 이를 ‘스토리(story)’로 만드는 도구가 된다. 또한 대학이 아닌 다른 교육기관에서 받은 배지도 학습자 지갑으로 가져와 함께 보관하고 보여줄 수 있다. 학습자 지갑은 여러 형태로 만들 수 있는데, 이미 무상 또는 상용 템플릿이 많이 개발된 ‘e-포트폴리오’를 활용해서 꾸밀 수 있다. 여기에는 교육기관이 발행한 온라인 수료 증명서(certificate)는 물론 활동했던 사진과 비디오, 관련 웹 사이트 같은 다양한 형태의 자료와 정보를 탑재할 수 있다.

이렇게 만들어진 개인 포트폴리오는 상급학교 진학, 국내외 기업으로의 취업, 유학 등 전환기적 상황에서 과목명과 학점을 보여주는 성적 증명서보다 훨씬 효과적으로 자신의 역량과 강점을 소개할 수 있는 도구가 된다. 대학에 다니면서 어떤 꿈을 키우고 이를 위해 어떤 배움과 경험을 해왔는지, 그 결과 어떠한 역량을 길렀는지 생생하게 보여줄 수 있기 때문이다. 오픈 배지와 개인 포트폴리오는 기업이 인재를 선발할 때도 유용하게 쓰일 수 있다. 지원자가 어떠한 경험을 했고, 어떤 역량을 갖췄는지를 다면적으로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나아가 이러한 정보를 활용하면 인재를 적재적소에 배치하고 중도 탈락이나 조기 이직을 예방할 수 있다.

오픈 배지와 개인 포트폴리오를 활용한 학습경험 기록 체제는 ‘개인화된 맞춤형 학습(individualized learning)’을 촉진하는 윤활유 역할을 할 수 있다. 학생은 자신이 수집한 배지와 개인 포트폴리오를 보면서 진로나 학습 목표에 비추어 어떤 활동 경험이 부족한지, 어떤 역량을 더 길러야하는지를 생각해볼 수 있기 때문이다. 때로는 친구의 이력과 비교해보면서 건강한 자극을 받을 수도 있다. 어린 시절에 딱지를 모으듯 여러 가지 배지를 모으는 재미에 빠질 수도 있는데 이는 더 많은 프로그램에 참여하게 하는 동력이 된다. 즉, 대학이 오픈 배지와 개인 포트폴리오를 잘 활용하면, 학생들이 다양한 학습 기회를 능동적으로 탐색해서 참여하고 이를 통해 얻는 교육적 성과를 체계적으로 기록하고 다음 단계로 나아가는 ‘자기 주도적 학습자’를 길러낼 수 있다.

성균관대는 ‘학생 성공’의 가치와 이념을 구현하기 위해 디지털 배지와 e-포트폴리오를 적극적으로 활용해왔다. 가장 먼저 대학은 학생들이 수업 외 주요 교육 프로그램을 한눈에 볼 수 있는 디지털 플랫폼(챌린지 스퀘어)을 만들었다. 대학의 주요 기관들이 비교과 프로그램을 개설하려면 여기에 프로그램에 관한 정보를 올려야 한다. 학생들은 챌린지 스퀘어를 살펴보면서 참여하고 싶은 프로그램을 찾고 참여 신청을 한다. 학생들이 프로그램을 쇼핑하는 ‘학습 상점’인 셈이다. 나아가 이 플랫폼은 해당 교육 프로그램을 성공적으로 이수한 학생에게 디지털 배지를 발행하는 창구 기능을 한다. 학생들은 여기서 받은 디지털 배지를 e-포트폴리오 같은 학습자 지갑에 보내서 관리하고 공유한다.

궁극적으로 챌린지 스퀘어는 대학이 제공하는 비교과 프로그램의 개설, 학생의 참여와 성과에 관한 모든 정보와 흔적이 쌓이는 빅데이터 플랫폼이 된다. 대학은 이를 분석해서 학생들이 많이 찾는 인기 프로그램, 이수율이 높은 프로그램, 만족도가 높은 프로그램이 무엇인지 파악해서 환류할 수 있다. 여기에 탑재된 각 프로그램은 각각의 학생 성공 역량과 매칭되어 있는데, 대학은 이를 통해 어느 역량과 관련된 프로그램에 학생들이 많이 참여하는지, 어느 프로그램에서 디지털 배지가 많이 발행되는지를 분석하고 환류함으로써 ‘데이터 기반 학생 성공 체제’를 더욱 고도화하고 있다.

고등교육 환경이 급변하고 있다. 앞으로 졸업장보다 어떤 역량을 갖추었는지가 중요해진다. 학생들은 캠퍼스 안팎의 다양한 프로젝트와 활동에 참여하면서 미래 삶과 직업에 필요한 지혜와 역량을 함양한다. 이런 상황에서 대학이 정규 수업과 학점의 제공에 머무른다면 다른 교육 공급자와 비교해서 경쟁력을 갖추기 어렵다.

‘대학이 학생을 뽑는 시대’는 가고, ‘학생이 대학을 선택하는 시대’가 온다. 학생이 대학을 선택하는 첫째 기준은 대학이 학생 성공을 위해 얼마나 노력하느냐가 될 것이다. 디지털 기술을 접목한 오픈 배지와 개인별 포트폴리오, 빅데이터 기반 학습 안내와 진로 지도 플랫폼은 학생의 꿈, 진로, 학습경험을 체계적으로 연계해서 학생 성공을 구현하고 대학을 살리는 최고의 전략이 될 수 있다. 나아가 이러한 디지털 교육 혁신을 평생학습에 접목하면 우리나라는 생애에 걸친 학습과 성장이 꽃 피는 ‘창의적 학습국가’로 도약할 수 있다.

<한국대학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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