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전설의 공화국 베네치아

베네치아는 전설의 공화국이다. 어느 연구자는 “인간이 만든 수많은 도시 중에 베네치아야말로 아름다움의 상징이고, 현명하게 정치를 운영한 표본이며, 그 도시 거주민들은 절제 있는 생활로 경제적인 풍요를 누렸다.”고 적어 놓았다. 베네치아 공화국은 5세기경 게르만의 한 집단이 이탈리아 북부로 들어와 여기에다 다른 종족의 약탈에서 벗어나기 위해 아드리아 바닷가의 펄 밭에 통나무로 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성채를 만들었다. 8세기부터 1797년까지 근 1,000 여 년간 지중해의 무역을 독점했다.
베네치아 사람들은 장사에도 이골이 난, 천부적인 상인이었다. 조그만 해양 도시였기에 외국과의 교역이 그들의 생사를 좌우했다. 일찍부터 상술이 발전했는데 상대방에게 “필요한 물건을 적절한 가격으로 제공하는 것”을 중시했다. 베네치아 상인들은 거짓이나 사기행위는 결과적으로 자신들에게도 손해가 되는 재앙이라고 생각했으며 성실과 정직이 상인주의의 기본임을 확신했다.

2. 최고 지도자들은

베네치아는 기원 8세기부터 주민이 지도자를 직접 선출하는 자치도시였다. 이렇게 선출된 지도자는 “베니스 최고 일꾼”이라는 뜻의 도제 (Doge)라고 불렀다. 도제의 요건은 교역선의 선장이나 해군 장교로 전공을 세워야했다. 주로 귀족가문 출신으로 어릴 때부터 “치열한 학습과정”을 거쳤으며 해외사정의 학습과 경험도 중시했다. 명문가문의 자제라도 베네치아를 위해 큰 전공을 새우지 않으면 도제가 될 수 없었다. 이렇게 선출된 도제 중에 뛰어난 이로는 피에트로 오르세울로 2세, 엔리코 단돌로(Enrico Dandolo), 피에트로 그라데니고 등을 들 수 있다. 이들 중에도 극적인 지도자는 엔리코 단돌로다. 그는 1107년 귀족가문 출생으로 39대 도제(Doge)로 1192년~1205년간 베네치아를 통치했다. 그 시기는 제4차 십자군 원정기로 인근의 제노바와도 맞섰던 시기였다. 그가 도제로 선출되었을 때는 노인의 나이로 시력도 좋지 않았지만 강인한 정신력으로 조국 베네치아를 위한 최후의 헌신을 다짐했다.

3. 눈먼 도제의 진두지휘

그때는 제4차 십자군 원정기로 이 전쟁에 베네치아는 필요한 함선과 생필품의 보급, 그리고 군사적인 지원을 약속했다. 단돌로는 이 기회를 이용해서 에게 해에서 베네치아의 주도권을 장악하려했다. 제4차 십자군 원정의 최고 정점은 엔리코 단돌로가 직접 지휘한 비잔티움 제국의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성전이었다. 기원 1203년 6월 십자군과 베네치아 연합군이 콘스탄티노폴리스를 대대적으로 공격했지만 콘스탄티노폴리스는 난공불락의 요새였다. 이때 단돌로는 80을 넘긴 반 실명상태의 노인으로 초인적인 힘으로 병사들을 진두지휘했다. 마침내 그 요새를 파괴, 베네치아 공화국의 국기인 산마로크 깃발을 그 자신이 점령지의 땅에다 꽂을 수 있었다. 이날의 장면을 시오노 나나미는 소설가다운 필체로 이렇게 묘사했다. “엔리코 단돌로는 전신을 완전하게 무장하고 기함인 갤리선의 뱃머리에 진홍색인 성 마르코 사자기를 옆에 들게 하고는 꼼짝도 하지 않고 내내 서 있었다. 갤리선이 안벽에 닿을까말까 할 때였다. 큰소리로 나를 물가에 내려놓아라. 내려놓지 않는 자는 엄벌에 처하겠다고 명령했다. 기함에 있던 사람들은 원수의 명령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80세가 넘어 시력이 반장님인 원수가 국기를 옆에 들게 하고 안벽에 내려서는 것을 보고는 베네치아인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자기의 용기가 모자람을 부끄러워하고 앞 다투어서 상륙하기 시작했다.”

그 공성전에도 눈먼 도제는 살아남았다. 그 노인과 만난 사람들은 그가 판단력과 분별력이 대단한 인물임을 알게 되었다. 이 전쟁이 끝난 뒤 십자군 기사들과 몇몇 영주들 사이에는 단돌로를 라틴 제국의 초대 황제로 옹립하려했다. 그러나 그는 이 요구를 외면했다. 베네치아 제일주의로만 치달린 단돌로의 지향은 베네치아의 전통을 지키는 것이 더한층 소중했기 때문이다. 그는 개선장군으로 조국에도 돌아가지 않았다. 개선장군으로 쏟아지게 될 개인적인 우상화도 베네치아의 전통과 안전에는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는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사망했으며 그곳 성당에 묻혔다. 베네치아 공화주의의 전통을 지키기 위해 개인적인 위세나 황제의 직위도 거부했던 그의 선택은 베네치아의 빛나는 전통으로만 남게 되었다.

<한국대학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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