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약소국가의 실상

위대한 정치가가 없는 국가의 운명은 어떻게 될까? 이 물음에 대한 대답은 오직 하나뿐이다. 쇠약한 국가로 전락해서 끝내 망국의 한을 안게 된다. 어느 한 나라가 식민지로 종속되었다는 것은 그 국가에 위대한 지도자가 없다는 뜻이다. 강성한 국가에는 반드시 위대한 지도자가 있다. 무능한 지도자가 국권을 점유하면 그 국가는 쇠잔의 길로 접어들고 백성은 고통으로 떨어지게 된다. 이렇게 되면 위대한 지도자를 기리는 백성에게는 그들의 기원이 담긴 정감록(鄭鑑錄)이나 각종 비기(秘記)등이 등장한다. 이들 책자는 언젠가는 위대한 지도자가 나타나 백성을 구하고 사해를 평정해서 거대국가를 이룩할 것이라는 ‘막연한 희망’으로 채워진다. 위대한 지도자가 없다 보니 권신들의 발호는 나라를 강대국에 맡기면서도 그들 일문의 영화만 지키면 그만이라는 식의 민족 반역까지 자행하게 되는데 이런 현상이 곧 조선왕조 말기의 정치였다.

2. 국란을 겪으면서도

조선왕조에도 민족사의 비극은 끊이지 않았다. 선조시대의 임진왜란과 인조 연간의 병자호란은 44년 만에 되풀이된 국란이었다. 임진왜란만 해도 선조 25년부터 6년간 일본 침략군의 습격으로 삼남의 수령 중 다수가 도망cl거나 항복했고 국왕 선조도 4월 30일에 주변 몇몇을 데리고 황망하게 피난길에 올랐다. 무능한 왕조에 분노했던 한성의 백성들은 장례원(掌隷院)과 형조에 불을 질렀고 왕궁을 파괴했다.

그 전란 속에서도 이순신(李舜臣) 장군과 권율(權慄), 박진(朴晉), 이양원(李陽元) 장군 등의 활약에다 곽재우(郭再祐), 김면(金沔), 정인홍(鄭仁弘), 고경명(高敬命), 김천일(金千鎰), 조헌(趙憲), 정문부(鄭文孚), 정기룡(鄭起龍) 장군의 의병과 휴정(休靜)·유정(惟政)의 승병이 없었다면 국왕 선조도 압록강을 건넜을 지도 모른다. 병자호란에도 국왕 인조는 평민 복색으로 왕자와 함께 삼전도의 수항단에서 청 태종에게 삼배구고두례(三拜九敲頭禮)의 항복례를 드리는 치욕을 겪어야 했다. 그런데도 그 시대의 고위 관료들은 주전파와 주화파로 나뉘어 명분논쟁으로 세월을 보냈다.

3. 척사소와 개화의 논리는

놀라운 일은 조선왕조의 말기에 일어났다. 서양과 일본의 군함이 몰려오는데도 조야의 대응논리는 척사위정론(斥邪衛正論)이 주류였다. 비분강개에 찬 유생들의 ‘지부상소(持斧上疏)’는 존화적(尊華的)인 저항론으로 되어 있었다. 한편 일본의 개화를 본받아 일본의 힘을 빌려 우정국의 쿠데타를 획책하다 끝내 일본으로 도망친 개화파도 기막힐 뿐이다. 이러한 성격은 일본 식민지로 전락된 뒤에도 별로 다르지 않았다. 일제 식민지 통치도 엄격한 의미에서는 조선왕조의 일부 지배세력이 일본 제국주의 침탈세력에 빌붙은 전형적인 식민통치체제였다. 그 시대 조선왕조의 고위 관료 중에는 일본 총독부의 귀족 칭호를 받은 이도 있었고 총독부 군수로 식민지 통치기의 특권층으로 군림한 사람도 있었다. 이들 친일 세력에게 개화나 계몽의 이데올로기는 그들의 현실성을 합리화하는 주장이었을 뿐이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이미 앞에서도 말했지만 위대한 지도자가 없었기 때문이다. 적어도 ①올바른 시대성에 대한 정확한 인식과 ②그것을 이룩할 효과적인 대응책으로 ③세상을 개혁하고 바로 잡아서 ④온 백성이 마음을 모아 튼실한 국가를 이룩해야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전쟁과 같은 위기상황에서는 국왕이 직접 군사를 진두지휘해야 했다. 군사 조련의 경험도 없었고 말 한 필조차 재대로 다룰 수 없었던 문약한 국왕이나 고위관료로는 국난에 효율적으로 대처하기가 힘들었다.

그뿐 아니라 국왕이나 고위관료라면 시대 변화와 외국 사정에 대한 정보 수집에도 민감해야 했고 국왕의 첩보망은 국왕-관료-백성의 명령체계를 넘어 국왕과 백성의 근접 관계로 나아가야 했다. ‘첩보 없는 정치 없다!’는 논리는 오직 밤잠을 설치면서 백성을 생각하는 국왕만이 보여줄 수 있는 장기였다. 그렇기에 기껏해야 중국에서 들어온 몇 권의 서책으로 세계 변화를 읽고 실현성이 없는 변법자강론이나 량치차오(梁啓超)의 저술을 대단한 가르침으로 여긴 지적 상황에서는 ‘지체된 국가’의 운명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는데 이러한 상황이 바로 조선왕조 말기였다.

*** 진덕규 교수는 ...
이화여대 명예교수. 역사정치학자. 현재는 (재)한국연구원 이사장으로 있다. 주요 저서로는 <한국정치의 역사적 기원>, <한국현대정치사서설>, <한국정치와 환상의 늪>, <권력과 지식인>, <민주주의의 황혼> 등이 있다. 

<한국대학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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