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정치가를 위한 조건은

지난번에 이데올로기를 이야기하면서 한국에서는 예로부터 이념적인 파당성과 사대주의 때문에 위대한 지도자가 나오지 못했다고 적어 놓았다. 그 외에도 정치가가 되려면 일정한 지적 학습 과정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사실도 덧붙이고 싶다. 이런 학습은 학교에서도 행해지지만 그것만으로는 불충분하다. 오히려 더 중요한 것은 자신의 뜻을 펼치기 위해 그 만의 특별한 학습과정을 거쳐야 한다. 정치가가 되려면 사회과학의 핵심 책자도 읽고 여기에 덧붙여 역사와 사회를 깊게 다룬 고전도 천착해야 한다. 만일 이런 과정을 거치지 않고 정치가로 나서면 이는 자신이나 주변 사람에게 도움을 줄 수 없을 것이며 오히려 어려움만 가중 시킬 것이다.

2. 정치가로 나서지 말아야 할 사람들

사람들은 다 정치가가 될 수 있다. 그렇지만 올바른 정치는 아무나 할 수 없다. 준비 안 된 사람들이 정치가로 나서면 세상은 혼란에 떨어진다.

1945년 해방 이후, 극심한 혼돈기로 거짓과 사기가 들끓었다. 민족적 지도자로 자처한 인사들이 한 둘이 아니었다. 그 시절에 이런 풍자가 유행했다. ‘미국에서 오면 박사, 만주에서 오면 장군, 중국에서 오면 독립지사’라는 말이 그것이다. 그저 남 앞에 우쭐댔던 사람들이 정치가로 나섰다. 걸핏하면 국가를 위한다면서 눈물로 호소했던 이들이 대정치가의 반열로 올라섰다. 나라를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만을 위해 일했을 뿐이다. 결국 정치에 나서지 말아야 할 이런 저런 인물을 빼면 남는 인물은 적을 수밖에 없다. 그저 사람답게 살면서 이웃을 정성껏 돌보는 사람이 정치가의 최소 요건을 구비하게 된다. 여기에 덧붙여 지적으로 스스로를 달구고 세상과 시대의 흐름을 궁구하면서 겸손과 헌신으로 일한다면 큰 정치가의 길로 접어들 수 있을 것이다.

3. 정치가가 되는 통로는

대학에서 힘들었던 시기는 1970년대 중반부터 80년대도 빼 놓을 수 없을 것이다. 이 시기는 시대적인 흐름도 그랬지만 대학생들 스스로 ‘선택된 엘리트’니 ‘창조적 리더’, 또는 ‘민족적 헌신’이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그러나 이들은 분명히 그런 표현에 합당한 위치에는 이르지 못했는데도 그렇게 주장했다. 그런 그들에게도 미친 듯이 책을 읽고 깊은 번민을 먼저 해보라고 권하고 싶었다.

이념이 큰소리를 치고 패거리가 거리를 휩쓰는 세상에는 바람직한 지도자가 나올 수 없다. 이런 현상이 해방된 그때부터 그대로 계속되고 있었다. 그 과정에는 수많은 정치단체들이 속출했는데 그 중에는 청년단체가 많았다. 이승만의 자유당 통치기까지 이름을 날린 청년단체로는 민족청년단, 대동청년단, 대한청년단, 여기에다 반공청년단도 있었는데, 이들 단체들이 많은 젊은이들을 정치의 현장으로 흡인했다. 여기에 참여해서 뒷날 국회의원이 된 이들도 있었으니 이점에서 이것은 분명히 정치적인 출세의 통로였다.

이런 식으로 정치에 참여하면 바른 정치나 국가의 미래를 올바로 이룩할 체계적인 지적 기반을 다듬기가 힘들게 된다. 어디서 들은 몇 마디 정치 구호를 앵무새처럼 주장하면서 정치 세계에 뛰어 들었을 것이 분명하다. 그러다보니 정치가의 통로는 대체로 다음 몇 가지로 정해지게 되었다. ①고시합격→ 고위 관직자로 승진→ 국회의원→ 정치가로 활동 ②학계→ 대학교수→ 정관계와의 밀접한 관계→ 국회의원으로 선임→ 정치가로 활동 ③기업계→ 사회유지로 활동→ 정계나 관계와 연계→ 정치가로 활동 ④사회운동→ 시민단체 참여→ 정치와 연계→ 정계로 진출→ 정치가로 활동 ⑤언론계→ 정관계와 연계→ 관직이나 정당에 참여→ 정치가로 활동 ⑥정당 및 의원 보좌활동→ 관계나 정계로 진출→ 정치가로 활동 ⑦연예계→ 인기 연예인→ 정치인이나 정당과의 관계→ 정치가로 활동 등이 그것이다.

그러다보니 어느 결에 고전을 읽고 세상을 구원할 방책을 궁구할 수 있었겠는가! 결국 정치의 물결에 휩쓸려 떠도는 것이 정치가의 모습이 돼 버렸다. 이처럼 스스로를 닦아 대정치가의 길로 나서는 것과는 너무나 다른 길로 달려온 것이 지난날 한국 정치의 모습이라 해도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 진덕규 교수는 ...
이화여대 명예교수. 역사정치학자. 현재는 (재)한국연구원 이사장으로 있다. 주요 저서로는 <한국정치의 역사적 기원>, <한국현대정치사서설>, <한국정치와 환상의 늪>, <권력과 지식인>, <민주주의의 황혼> 등이 있다. 

<한국대학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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