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5년 10월 8일에 일본인들이 민비를 시해한 을미사변이 일어나고 뒤이어 12월 30일에 단발령이 실시되자 전국에서 민중의 격분을 대변하는 제1기 의병활동이 시작되었다. 이때의 의병투쟁은 그 지도부가 위정척사계열의 유생들에 의해 독점되다시피 했다. 1896년 각지에서 분산 활동하던 의병부대들은 당시 전국적으로 이름 높던 유인석(柳麟錫)을 총대장으로 추대, 연합부대로 전력을 강화했다. 이 연합부대에 평민출신 의병장 김백선이 4백 명의 포수를 이끌고 합류했다. 그해 3월 김백선은 선봉장이 되어 자기 부대원 3백 명을 이끌고 충주성의 일본군 수비대를 공격하여 성을 점령하고 충청도관찰사를 처단하는 동시에 북문으로 도주하는 일본군을 추격하여 용전분투했다. 수일간 계속된 싸움에서 유인석부대의 중군인 양반출신 의병장 안승우(安承禹)가 원병을 보내지 않았기 때문에 중과부적으로 김백선은 결국 패퇴했다. 흥분한 김백선은 안승우의 목을 베려 했다가 유인석에 의해 군법으로 처형됐다. 평민이 양반에게 불경죄를 저질렀다는 것이다. 김백선의 처형으로 사기가 땅에 떨어진 의병부대는 충주와 제천에서 연패를 거듭한 끝에 해산되었다.

성리학만을 배타적으로 추종하는 위정척사파 선비의 기준으로는 상하 신분간의 차별 질서야말로 우주적 원리의 연장선상에서 존중되어야만 할 절대원칙인데 아무리 전란중이라 할지라도, 오히려 전란 중일수록 더욱 이 원칙을 공공연하게 파괴하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의병운동의 역사 속에서 일원적 가치관에 종속되어 융통성을 발휘하지 못한 채 낭패하는 예는 그 후 제3차 의병활동에서도 되풀이된다. 1907년 고종황제의 양위와 군대해산 등에 자극되어 일어난 제3기 의병활동에서 3천여 명의 해산군인이 포함된 1만여 명의 의병병력이 모여 추대한 총대장 이인영(李隣榮)은 서울 진입 총공격에 임박해 부친사망의 부고를 받자 ‘불효어친(不孝於親)은 불충어국(不忠於國)’이라면서 작전중지를 포함한 후사를 부하에게 맡기고는 그날로 귀향해버렸다.

유인석이나 이인영의 처신을 오늘의 관점에서 평가하는 것은 공평치 못할 수 있다. 위정척사계열의 선비들이 평생 동안 교육을 통해 몸에 익힌 일원적 가치질서를 전제로 하고서만 그들의 행위선택을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당연히 설명되었어야 함에도 아직까지 설명되지 않고 있는 정말 중요한 부분은 천대받다가 죽을 수도 있는 자리임에도 불구하고 유인석을 찾아간 김백선과 그를 따라 나선 4백 명 그의 동무들, 그리고 이인영을 따랐던 1만여 명 의병들의 행위 선택의 동기다. 의병활동에 참여한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민초들의 행위선택의 동기와 배경을 그들의 인격과 관련지어 생각해 볼 여지는 없는 것인가? 목숨을 거는 행위의 선택은 누구에게나 일생일대의 결단일 수밖에 없다. 그러한 결단을 하기까지의 인격과 가치관은 어떤 환경과 문화와 교육에 의해서 형성되었을까를 묻는 일이야말로 언필칭 교육을 연구한다는 이들의 당연한 과업이 아닐까 싶다. 위정척사파처럼 일원적 가치질서에 무비판적으로 종속당하기 좋아하는 기득권 세력들의 관행은 오늘의 우리 사회 속에서도 하나의 전통인 것처럼 교육체제를 통해 이어져 오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과거제도의 유령인 출세지향주의, 오늘의 물질문명을 상징하는 배금주의, 천민자본주의 같은 종적질서의 가치관이 성리학의 명분론을 대신해서 일원적 권위를 행사하고 있는 것이 다를 뿐이다.

*** 김인회 교수는....
연세대 교육학과를 나와 동대학원에서 석박사과정을 마쳤다. 1969년 이화여대에 부임했고 1980년 연세대로 자리를 옮겨 2003년 정년퇴임했다. 한국교육사학회 회장, 연세대 박물관장, 한국교육철학회 회장, KBS객원해설위원, 혜곡최순우기념관 관장 등을 역임했다. 현재 (재)내셔널트러스트문화유산기금 이사장, 한국박물관교육학회 명예회장을 맡고 있다.

<한국대학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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