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레드 다이아몬드의 책 『총, 균, 쇠』를 읽으면서 인류문명의 이동은 서쪽에서 동쪽 방향으로 진행되었다는 논지에 설득 당해 나 나름대로 우리 민족의 형성과정에 대한 구상을 했던 적이 있다. 즉 서쪽 풍요한 초승달 지역으로부터 육로를 통해 이동하기 시작한 집단들이 아세아대륙을 지나 더 이상 갈 곳이 없는 동쪽 끝 지점에까지 이른 곳이 바로 한반도일 것이라는 생각이다. 게다가 한반도는 지형적으로 대륙 동쪽 끝에 붙어있는 항만과도 같은 모양새다. 해류의 이동경로를 생각하면 당연히 동남아 지역의 다양한 집단들도 해로를 통해서 한반도에 도달할 수밖에 없다.

일만 년도 넘었을 오랜 세월에 걸쳐 이동해 오는 과정에서 다양한 집단들 간의 혼혈이 거듭되었을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인류 역사상 의례히 되풀이 일어날 수밖에 없는 집단 질병 기근 전란 등의 과정을 거치면서도 끝까지 살아남은 개체들은 분명코 생명력 강하고 여러 부분에서 우수한 유전인자를 지닌 무리일 수밖에 없다. 아세아 대륙의 동쪽 끝에까지 이동해 와서 정착한 우리 민족의 유전인자가 특별할 수밖에 없을 것은 당연한 일이다.

최근 들어 나의 이러한 개인적 상상을 명쾌하게 학문적으로 정리 해 주는 고고학자의 연구물을 만날 수 있었다. 한국 민족이 절대로 단일민족이 아니라 남아시아의 남방계 농경민들의 유전인자와 북아시아의 북방계 유목민들의 유전인자가 섞여 있는 복잡한 혼혈 집단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는 주장을 고고학, 인류학, 민속학, 역사학, 신화학, 언어학, 토템연구, 건축학, 생명공학 등등의 다양한 연구 분야들로부터 찾아낸 증거들을 동원하여 입증한 논문이다. 아울러 천손신화, 난생신화, 동혈신화 등 우리의 국조신화들을 보면 그렇게 다양한 신화들이 발견되는 것은 그만큼 다양한 민족들이 이 땅에서 어울려 살았다는 증거라는 주장이다.

편견에서 벗어난 자유로운 눈으로 우리 민족 집단의 삶의 역사와 내용을 살펴보노라면 우리가 원래부터 문화다양성 생활에 현명하게 적응해 왔던 열린 민족 집단이라는 증거가 도처에서 발견된다. 실제로 우리의 역사 속에서 태평성대를 이룬 전성기의 특징은 '개방'이라고 보는 견해가 있다. 나당전쟁 이후의 8세기 통일신라, 대 거란 전쟁 승리 이후 11세기 고려, 조선건국 1세대 만에 찾아 온 전성기인 15세기 세종시대를 들 수 있는데 국력이 맹위를 떨치고 문화가 화려한 꽃을 피웠던 이 세 시기의 공통적 특징은 바로 '개방'이라는 것이다. 나라가 융성하기 위한 전제조건은 개방이고, 그 결과 융성기에 접어들면 들수록 개방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우리역사의 특징이며, 지도층의 개방적이며 실용적인 태도와 시대의 변화를 읽는 통찰력, 그리고 결단이 우리 역사의 융성기, 열린 민족주의 시대를 이끌었던 핵심 요인이라는 분석이다.

한강의 기적은 절대로 우연일 수가 없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그렇다고 현재로서는 합리적으로 설명할 사회과학의 체계나 이론이 나온 것도 없을 수밖에 없다. 사회과학은 기왕에 일어난 사회 문화적 사실들을 전제로 하고서만 이론을 만들어갈 수 있는데 대한민국의 현대사는 기왕에 있었던 어떤 역사와도 비슷하지 않기 때문이다.

*** 김인회 교수는....
연세대 교육학과를 나와 동대학원에서 석박사과정을 마쳤다. 1969년 이화여대에 부임했고 1980년 연세대로 자리를 옮겨 2003년 정년퇴임했다. 한국교육사학회 회장, 연세대 박물관장, 한국교육철학회 회장, KBS객원해설위원, 혜곡최순우기념관 관장 등을 역임했다. 현재 (재)내셔널트러스트문화유산기금 이사장, 한국박물관교육학회 명예회장을 맡고 있다.

<한국대학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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