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강을 맞은 대학 캠퍼스의 게시판이 학내 동아리 등에서 부착한 홍보물로 몸살을 앓고 있다. 신규회원을 모집하거나 개강 모임을 알리기 위한 '게시물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학내 게시판은 물론 건물의 담벼락, 도로 바닥, 심지어 공중전화 박스까지, 게시물을 붙일 수 있는 여유 공간에는 어김없이 학생들이 붙인 게시물이 넘쳐나고 있다. 여기에 학원 강좌 개설, 취업설명회 등 외부기관에서 붙인 게시물까지 가세하면 캠퍼스는 순식간에 ‘게시물 전쟁터’로 돌변한다.
최근 본지가 전국 27개 대학에 재학 중인 대학생 1,200명과 교직원 540명을 대상으로 캠퍼스 환경에 대한 설문조사 결과, 학내 구성원 절반 이상이 ‘정비시스템 도입이 시급하다’고 지적했다. 캠퍼스 환경에 대한 문제의식이 대학사회에 널리 확산되고 있다.
몇 해 전부터 '글로벌 KU'를 표방하며 갖가지 대학혁신을 주도하고 있는 고려대의 경우는 어떨까?
학생과의 대타협으로 '자치규약' 마련
고려대의 경우, 학생들과 함께 ‘홍보물 게시 자치규약’을 만들어 게시물을 관리하고 있다. 때문에 다른 대학에 비해 현수막 등으로 인한 캠퍼스 환경 훼손은 덜하다. 그러나 자치규약의 일부 준수사항이 아직 까지 제대로 지켜지지 않아 보완책 마련이 시급하다.
고려대 안암캠퍼스(인문계)의 경우, 현재 정경대 후문 등 7~8군데 게시판에만 홍보 게시물이 부착돼 있다. 캠퍼스 바닥이나 건물 벽 등에 붙은 게시물은 눈에 띄지 않았다.
안암캠퍼스에 이런 게시문화가 정착하게 된 것은 지난 2005년 있었던 직원과 학생과의 '대타협'에서 비롯됐다. 당시 대학측과 총학생회는 '홍보물 게시에 관한 자치규약'을 함께 만들었다.
학생처는 지난 2005년 4월, 무분별하게 나붙는 게시물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총학생회, 동아리연합회 등 학생대표 기구와 협상에 나섰다. 학생처가 시간이 지나 흉물스럽게 변한 게시물을 사진으로 찍어 학생들에게 보여주며 설득에 나선 것이다.
당시 학생들은 "게시판이 모자라다"며 반발했다. 학생처는 대학본부에 학생들의 요구사항인 게시판 추가설치, 현수막 H빔 보수 등을 전달해 학교측의 조치를 이끌어 냈다. 학생들도 정해진 장소에만 홍보물을 붙이기로 약속, 지금의 게시물 문화가 마련됐다.
학생처와 관리처, 총학생회는 2005년 4월 16일, '홍보물 게시에 관한 자치규약'도 만들었다. 당시 자치규약엔 학교측과 학생간의 합의 내용이 담겨져 있다. 자치규약은 "학생지원부에서는 총무부 등 관련부서와 협조해 홍보물 게시 공간 확충을 위해 노력할 테니, 학생들은 자치규약을 참조해 홍보물을 붙일 때 학생 스스로 정한 자치규약을 반드시 준수해 줄 것"을 당부하고 있다.
학생지원부 직원인 이장욱씨(자치활동 담당)는 “자치규약이 만들어 진 후 학생들의 게시물 관리가 용이해 졌다”며 “학생들이 스스로 지키기 위해 만든 자치규약인 만큼 학생들도 캠퍼스 환경 관리에 공감하고 있다”고 전했다.
자치 규약의 일반적인 준수사항(제2조)은 ‘홍보물 하단에 개인 또는 단체명, 연락처, 게시기간을 반드시 기재하고 최대 게시기간은 2주로 제한(1항)’하고 있다. 또 ‘게시기간이 종료된 게시물은 2일안에 행사 주관 개인이나 단체에서 자진 철거’(2항)하도록 돼 있다.
일부조항 안 지켜져 개선 목소리
그러나 이같은 자치규약의 세부적인 준수사항은 아직까지 제대로 지켜지지 않고 있어 대학측은 곤혹스러워하고 있다.
3월 27일 현재 안암캠퍼스 내에 붙여진 게시물을 조사해 본 결과, 대부분의 게시물에 단체명과 연락처는 대체로 기재되어 있었으나, 게시기간을 명시한 곳은 단 1곳도 발견할 수 없었다.
▲28일 공개강습회를 여는 문과대 풍물패 '푸른소리' ▲30일 개강모임을 여는 안양고 동문회 ▲27일 채용설명회를 여는 STX그룹 ▲29일 정기연주회를 여는 고려대 피아노부 등에서 부착한 게시물에는 단체명과 연락처는 명시돼 있었으나, 게시기간은 없었다.
특히 학교측과 자치규약을 함께 만들었던 총학생회도 지난 26일 열린 새내기 체육대회에 대한 게시물에 게시기간을 명시하지 않았다.
이와 관련, 총학생회 관계자는 "게시물을 급하게 부착하는 바람에 착오가 있었다"며 "게시기간을 명시해야 한다는 얘기는 들어서 알고 있으며, 다음부터는 잘 지킬 것"이라고 말했다.
이에 대해 학생지원부 이장욱씨는 "학생들 게시물에 게시기간이 기재되지 않는다는 점을 알고 있다"며 "학교에서는 지속적인 홍보를 하고 있는데 한 순간에 바뀌지 않는다"고 토로했다. 그는 "작년까지는 연락처조차 적지 않았는데, 꾸준한 홍보를 펼쳐 이제 연락처를 기재하지 않는 경우는 거의 찾을 수 없으며, 게시기간을 명시하는 부분도 계속 홍보하면 나아질 것"이라고 기대했다.
게시기간이 기재되지 않은 홍보물이 많기 때문에 학교 측에서는 행사 날짜를 보고 게시물을 일일이 철거하고 있다. 자치규약 2조 2항에 '행사 주관 개인(단체)에서 자진 철거토록' 한 규약도 지켜지지 않고 있는 것이다. 이는 자치규약에 합의한 총학생회가 지난 26일 끝난 새내기 체육대회 게시물을 여전히 철거하지 않고 있는 데서도 확인된다.
총무부 김인섭 과장은 "(게시물을 자진 철거토록 한 규약이) 거의 안 지켜지고 있다"며 "학교 직원들이 학기 초처럼 홍보물이 많을 때는 일주일에 한 번씩 캠퍼스를 돌아다니며 행사가 끝난 것들은 일일이 철거하고 있다"고 말했다.
자치규약 2조(일반적 준수사항) 3항에 명시된 '학교 제공 게시판에는 동일 내용의 홍보물을 1장만 게시한다'는 내용도 제대로 지켜지지 않고 있는 또 하나의 사례.
김인섭 과장은 "일부 학생들이 같은 내용의 게시물을 여러 장 붙이는 경우가 있다"며 "하나의 행사이면 1장만 붙여야 다른 사람에게도 피해가 가지 않는다"고 말했다.
홍보와 관리, 윈-윈하는 시스템 없나?
이에 대한 대안으로 고려대는 교내 CATV망에 학생참여를 확대하는 방안을 고민 중이다.
지난 97년 개국한 고려대 TV방송국(KTN)은 학내에 설치된 LCD화면을 통해 교내 방송을 송출하고 있다. LCD가 설치된 곳은 중앙광장, 중앙도서관, 학생회관 등 20여 곳. 2005년부터는 자동송출 시스템을 구축해 24시간 방송을 하며, 화면 하단에는 학내 행사 등을 문자로 공지하고 있다.
그러나 현재 교내 방송에 문자공지로 행사 내용 등을 알릴 수 있는 이들은 교직원으로 제한돼 있다. 교육매체실 김영식 프로듀서는 "고려대 포털시스템을 통해 알리고자 하는 내용을 올리면 간단한 승인절차를 거쳐 문자로 공지될 수 있다"며 "그러나 이는 교직원에게만 국한돼 있고, 학생들은 학생지원부의 사전허락을 거치도록 하고 있다"고 밝혔다.
교육매체실은 앞으로 문자공지에 대한 학생들의 참여를 유도하겠다고 밝혔지만, 이로써 현재 고려대의 게시판 문제들이 다 풀릴지는 여전히 미지수다.
현재 중앙광장 엘리베이터 등에 설치된 LCD화면에는 교내방송과 스크롤 방식을 통한 문자공지가 하루 종일 방송되고 있지만, 관심 있게 지켜보는 이는 드물다. 경영대생인 A군은 "엘리베이터를 기다릴 때만 잠시 볼 뿐 주의 깊게 지켜보진 않는다"고 말했다.
사범대 학생도 "학내 공지 사항은 보통 학교 홈페이지를 통해 접하고 있다"며 "게시판이나 건물에 설치된 LCD화면을 통해 정보를 습득하는 일은 매우 드물다"고 말했다.
때문에 고려대 역시 학생들의 다양한 요구를 위한 수용할 새로운 미디어를 필요로 하고 있다.
고교 동문회 모임 홍보물을 부착하던 공과대 학생들은 "홍보물을 부착한 뒤 하루 이틀이면, 그 뒤에 부착되는 또 다른 홍보물에 의해 묻혀 진다"며 "어차피 모임의 참석을 높이려면 회원들에게 개별적으로 연락을 취해야 한다"고 밝혔다.
학생지원부 직원도 "현재의 게시판으로는 (학내 게시물을 다 담기에는) 부족하지만, 그렇다고 학교 미관상 게시판을 추가할 만한 여유 공간도 없다"고 설명했다.
장동식 전 관리처장은 “25만여 평에 수십 개의 건물들이 퍼져있는 대학 캠퍼스는 학교 구성원뿐 아니라 외부인들도 자유롭게 출입할 수 있어 깨끗한 캠퍼스 관리가 무엇보다 힘이 든다"며 “디지털 시대에 걸 맞는 홍보물의 통합 관리가 필요하다”고 밝혔다. 장 교수는 “외부 기업이 PDP 등을 설치하는 것은 상업적인 문제만 해결된다면 충분히 가능한 대안”이라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