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윤수 스포츠평론가(성공회대 문화대학원 교수)

정윤수 성공회대 교수
정윤수 성공회대 교수

2020도쿄올림픽이 끝났다. 이번 대회에서 한국 대표단의 최종 성적은 종합 16위. 당초 10위권 이내를 목표로 했으니 그렇다면 ‘실패’한 올림픽인가. 잠시 다른 나라들, 몇몇 특징적인 나라들의 순위를 살펴보자.

노르웨이나 스위스, 덴마크, 스웨덴 등은 유럽의 ‘강소국’들로 특히 일상 생활의 스포츠문화로 보면 이른바 ‘선진국’이라고 할 수 있다. 탄탄한 스포츠 인프라, 활력 넘치는 생활 스포츠, 아이들부터 노인들까지 일상에서 스포츠를 즐길 뿐만 아니라 특정 종목의 경우에는 세계 수위권을 자랑하는 이 나라들의 이번 대회 성적은 모두 20위권이다. 39위의 아일랜드, 53위의 오스트리아 그리고 85위의 핀란드 역시 같은 맥락에서 보면 스포츠 선진국에 포함될 만하다. 금메달 숫자로 모든 것을 판단하는 ‘체육강국’이라는 점에서는 이 나라들이 뒤처지지만 방금 제시한 다양한 지표와 시설과 문화로 보면 ‘스포츠 선진국’이다. 그러니 우리 대표단이 16위를 차지한 것은 과거의 잣대로 보면 ‘실패’한 것이지만 앞으로 어떤 가치지향의 스포츠정책과 문화를 펼쳐야 하는가 하는 관점에서 보면 실패라고 단정하기 어렵다.

물론 당면한 대회에 출전해 당장의 경기에 모든 것을 쏟아 붓는 선수와 지도자의 입장에서는 애초의 목표에 도달하지 못해 자책도 하고 아쉬워하는 것은 당연지사다. 앞서 언급한 나라들의 선수들도 결정적인 순간을 온전히 자기 몫으로 성취하지 못했을 때 눈물을 글썽거렸다. 제도에 준해 참여하고 규칙의 엄격함 위에서 승패를 겨루는 스포츠의 특성 상 스스로 설정한 목표에 도달하지 못했을 때 그 상실감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것이며 이를 그저 ‘참가하는데 의의’가 있다는 말로 쉽게 위로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이러한 자연스러운 감정을 집단화하거나 반드시 어떤 방식으로 공식화하는 것은 위험하다. 과거에 우리 스포츠가 그랬다. 은메달을 따고 눈물을 흘려야 했고 생중계 방송에서는 통한의 석패라고 외쳤으며 이는 곧 올림픽을 바라보는 집합적 정서로 작동했었다.

그랬는데 이번 도쿄올림픽에서 그러한 감정의 거친 표출은 많이 사라졌다. 세계에서 두 번째로 잘한 선수들은 아쉬웠지만 그래도 웃었다. 세계에서 네 번째로 높이 뛴 선수는 어떤 색깔의 메달도 목에 걸지 못했지만 메달을 딴 선수들 이상으로 활짝 웃었다. 고약한 중계 멘트도 몇 번 있었지만 전체적으로 캐스터와 해설위원들의 감정 표현도 다채로웠으며 특히 다른 나라 선수들에 대한 품격 있는 호평도 인상 깊었다. 과거에는 우리나라와 경합하는 다른 나라 선수들을 잘 한다고 말하기를 꺼려했는데 많이 사라졌다. 다행이다.

왜 이런 현상이 두드러졌을까. 몇 가지 의미 있는 이유가 있다.

우선 이번 대회에 참가한 ‘젊은 선수’들의 문화적 환경이 달라졌다. 우리나라의 스포츠 환경이 시설이나 제도에서 부분적인 개선이 있었고 무엇보다 스포츠를 이해하는 방식이 변했다. 종목에 따라서는 세계 5위나 8위 혹은 올림픽에 출전했다는 것 자체로 이미 높은 성취를 이뤘다는 것을 이해하고 격려하는 문화가 형성됐다.

다음으로 스포츠를 바라보는 사회 전반의 인식이 달라졌다. 과거에는 올림픽의 성취가 곧 국가의 성취였다. 그러나 국제적 위상, 경제 수준, 문화 다양성 등의 전반적 향상에 의해 ‘스포츠를 통한 국위선양’이라는 기존 인식이 많이 누그러졌다. 한국 스포츠정책의 근간이 되는 ‘국민체육진흥법’의 제1조에서 ‘국위선양’이라는 단어도 이미 사라졌다.

이와 더불어 가장 중요한 요인은 최근 10여 년 동안 진행된 ‘청년 담론’이 스포츠에 투영됐다는 점이다. ‘청년 담론’의 초기 형태는 ‘아프니까 청춘이다’로 압축된다. 무한경쟁의 트랙 위에서 악착같이 ‘존버’해야 한다는 생각이 초기에는 압도했다. 온갖 스펙을 쌓아야 했고 ‘압박 면접’을 통과해야 했다. 청소년, 대학생, 청년들 모두가 고생했고 가족들이 극심한 경쟁의 터널을 함께 통과해야 했다. 그래서 어떻게 됐는가. 사실상 거의 모두가 상처를 입었다. 그런 고통을 격은 후에야 ‘함께 살자’는 논의가 전개됐다. 그렇게 최근 몇 년 동안은 서로 격려하고 위로하면서 함께 사는 방향을 온 사회가 모색하고 있다.

바로 이 시기에 이번 올림픽의 선수들이 선발됐고 훈련을 했고 도쿄에 갔다. 그들 자신이 그랬듯이 그들을 바라보는 사람들 모두가 같은 심정이 된 것이다. 저들 중에 준비 안 된 선수가 누가 있으며 고생 안 한 선수가 누가 있으랴 그러니 격려하고 위로하자. 이런 마음이 이미 사회적으로 형성된 것이다. 공존을 위한 사회적 연대와 정서적 공감이 도쿄올림픽의 지도자와 선수들에게 투영된 것 그것이 이번 올림픽의 중요한 시사점이다.

<한국대학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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