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AIST·동국대, 졸업 필수 요건으로 ‘고전 100권 읽기’ 도입
동명대 두잉학부, 전공선택과목 중 하나로 ‘고전 읽기’를 내세워
“고전 읽기는 세상을 보는 관점 형성하는 지름길”
“책 읽기 통해 지적 성취의 지형도를 스스로 그릴 수 있어”
수치화된 점수 중시하는 한국 교육에 안착하려면 고전 접근 장벽 낮추는 기초과목 필요
[한국대학신문 장혜승 기자] 책을 읽지 않으면 졸업할 수 없는 대학이 있다. 성인의 절반은 한 해 동안 단 한 권의 책도 읽지 않는 시대, 책읽기를 졸업 필수요건으로 도입하는 대학들이 늘고 있다. 이들 대학은 많게는 100권까지 학교에서 정한 일정 분량 이상의 고전을 읽고 서평을 쓰거나 발표를 하는 과목을 필수과목으로 지정하고 있다.
이른바 ‘고전 100권 읽기’를 도입한 대학들은 고전 읽기를 통해 학생들이 세상을 이해하는 관점을 형성하고 사안의 옮고 그름을 고민하는 판단력을 기를 수 있다고 강조한다. 교양교육 전문가들은 이 같은 고전 읽기가 졸업 평점, 수치화된 점수를 중시하는 한국의 풍토에서 안착하려면 교양 교육이 하위 교육이라는 인식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조언한다. 고전 읽기에 대한 접근을 쉽게 해주는 연습 과목을 개설하는 방안도 대안으로 제시된다.
■ ‘고전 읽기’ 졸업 필수 요건으로 지정하는 대학들 = KAIST는 우주, 자연, 인간, 사회, 예술, 기술 등에 관한 도서를 읽어야 졸업할 수 있는 융합인재학부를 지난해 신설했다. 카이스트 융합인재학부 학생들은 ‘지성과 문명 강독’ 과목을 필수로 이수해야 한다. 지성과 문명 강독 수강생들은 학기마다 우주, 자연, 인간, 사회, 기술, 예술 중 한 분야에 대한 명저 17권을 읽게 된다. 카이스트 융합인재학부에 따르면 졸업을 위해서는 ‘지성과 문명 강독’을 세 학기 총 9학점만 수강하면 되지만 ‘책 100권 읽기’가 융합인재학부의 주요 과정 중 하나인 만큼 여섯 학기 18학점을 수강하길 권장한다. 학생들은 책을 읽고 서평을 써야 한다. 서평의 양이 만만치 않다. 원고지 50장 분량의 글쓰기 서평이나 2시간짜리 영상에 담은 서평이다.
동국대도 지난 2014년 기존의 교양교육원을 단과대학급인 ‘다르마칼리지(Dharma College)’로 격상하고 교양교육 강화에 나섰다. 모든 동국대생들은 졸업하기 위해 ‘명작 세미나’ 과목을 이수해야 한다. 명작 세미나는 △존재와 역사 △경제와 사회 △자연과 기술 △문화와 예술 △지혜와 자비 등 5개 영역으로 나눠져 있다. 학생들은 5개 영역 가운데 3개 영역을 이수해야 한다. 세미나 과목에서 학생들은 영역별 필독서로 지정된 고전을 읽고 고전에 대한 내용을 주제로 4~5명 단위의 조를 짜 토론하게 된다. 개인별 에세이도 작성해야 한다.
전공필수는 아니지만 고전 읽기를 주요 교육과정으로 내세운 대학도 있다. 이른바 ‘3無교육(無학년, 無학점, 無티칭)’을 골자로 한 동명대 두잉학부는 전공선택과목 가운데 하나로 고전읽기와 글쓰기, 유튜브크리에이터 세 과목을 하나로 묶어 개설했다. 박현정 동명대 두잉학부 교학지원팀장은 “유튜버가 되기 위해서는 콘텐츠가 있어야 하는데 고전을 읽고 콘텐츠의 기초가 되는 지식을 쌓자는 취지”라며 “아직은 전공필수 과목이 아니지만 글쓰기와 고전읽기, 스피치 과목은 신입생들이 반드시 이수하게 할 방침”이라고 설명했다.
■ 고전 읽기, 당장의 효과는 보이지 않지만 지적 성취를 키우는 교육 = 고전 읽기를 졸업필수요건으로 정한 대학들은 책읽기가 단기간에 가시적인 교육적 효과가 생기는 건 아니지만 장기적 관점에서 대학생들에게 반드시 필요한 교육이라고 입을 모아 말한다.
정재승 KAIST 융합인재학부장은 “‘책 100권 읽기’를 통해 학생들이 지적 성취의 지형도를 스스로 그릴 수 있는 능력을 함양하는 역할을 기대한다”고 말했다. 이어 “젊은이들이 20대를 보내는 가장 의미있는 방법은 동시대 혹은 지난 세대가 온 인생을 걸고 쓴 책들을 통해 세상을 이해하고 나의 철학을 만들어가는 것이라 생각한다”고 강조했다.
실제로 학생들의 반응도 좋다. KAIST 융합인재학부에 재학 중인 이재현 씨(남‧19)는 “책 한 권을 매주 읽어야 하는 데다 서평까지 쓰려면 이틀이 걸린다. 책 읽는 데 하루를 잡고 서평 작성을 하루 정도 잡으면 이틀이 걸리는데 3학점짜리 수업치곤 많은 시간이 드는 건 사실”이라면서도 “철학 같은 분야는 이공계 학생들이 접해본 분야가 아닌 새로운 내용인데 살아가는데 도움이 될 거라고 본다. 특히 졸업하고 나서 과학정책 등 다양한 분야로 진출할 것을 고려하면 사회의 다양한 측면을 알 수 있다는 점에서 유익할 것 같다”고 말했다. 학생들의 이 같은 반응에 대해 정재승 융합인재학부장도 “‘늘 생각하면서 학교를 다녀서 너무 좋다’는 강의평가가 기억에 남는다”고 덧붙였다.
윤재웅 동국대 다르마칼리지 학장은 고전 읽기를 엔진에 비유했다. 윤 학장은 “고전을 공부하면 엔진의 마력이 좋아서 나중에 힘이 붙듯이 창의력과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이 생긴다”고 설명했다. 이어 “대학 4년 동안 고전들을 읽고 나면 바로 효과가 나타나는 게 아니고 오랜 기간 동안 좋은 책을 읽은 경험이 졸업 후 사회생활에서 알게 모르게 가랑비에 옷 젖듯 큰 효과를 나타낸다는 데이터도 있다”고 부연했다.
동국대 법학과에 재학 중인 조가영 씨(여‧23)도 “고등학교 때까진 교사가 진행하고 학생들이 습득하는 교육을 받다가 명작 세미나 과목을 통해 내가 맡은 발제 내용을 수강생에게 이해시키기 위해 발표를 집중해서 하고 질문에 대한 답변을 준비하면서 이게 대학수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 고전 읽기에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기초과목 필요 = 전문가들은 이처럼 사고력을 길러주는 고전 읽기가 졸업 평점, 수치화된 점수를 중시하는 한국의 풍토에 안착하려면 고전 읽기를 연습할 수 있는 과정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박정하 성균관대 교수(전 한국교양교육학회장)은 고전 읽기에 대한 장벽을 낮출 수 있는 기초과목 개설을 제시했다. 박 교수는 “고전 1권이라도 제대로 읽는 연습을 먼저 하는 것이 중요하다”며 “대학생들이 고등학교에서 고전 읽는 훈련이 안 된 경우가 많기 때문에 대학에서 고전 관련 교과목을 1학년 때 한 개라도 필수로 듣게 해서 읽는 훈련을 한 다음부터 몇학기 동안 추천도서 목록을 주고 읽도록 하는 게 좋다”고 조언했다.
학생들의 접근성을 고려한 도서 목록 선정도 중요하다. 박정하 교수는 “보통 대학의 고전 100선이 대학의 품위유지용 목록인 경우가 많다”며 “교수들도 제대로 안 읽을 고전을 넣기보다 ‘고전명저 목록’이라 해서 고전에 한정하지 말고 개념을 넓게 잡는 것이 좋다”고 설명했다.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처럼 저학년 대학생들도 읽을 수 있도록 가독성 있고 번역본이 잘 나온 책을 포함시켜야 한다는 뜻이다.
학생들의 동기 부여도 고려해야 한다. 주현재 삼육보건대 교수학습지원센터장(한국교양교육학회 부회장)은 “내재적인 동기 없이 억지로 읽는 고전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 모르겠다”며 “수업 외 프로그램에서 학생들의 자발적인 참여를 제고할 수 있는 방안을 적극 강구해보는 관점에서 접근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