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키지 않는 주제, 왜 하는지 모르겠다"
'학회 뒷바라지' 교수 요구 없어도 '대비'
힘들다 털어놔도 사회생활 못한다는 핀잔만
[한국대학신문 이재 기자] 올해 대학원 석사과정 3학기를 마친 K(27)씨는 촉망받는 제자다. 석사학위는 물론 박사학위 통과도 유력하다며 동경과 시샘의 시선을 받고 있다. 학부때부터 ‘우등생’이었던 K씨는 대학원에 진학한 뒤에도 지도교수의 ‘학회 뒷바라지’를 했다. 교수가 필요한 자료를 먼저 모아서 자료로 만들고 학회 업무도 본다. 때때로 해외연구 발표 등에도 동행을 요구받는다.
그런 K씨에게는 말 못할 고민이 있다. 연구하는 주제가 영 내키지 않는다. 역사를 전공하는 그는 세계교류사를 연구하고자 했지만 국내 학계 현실에 밀려 국사를 연구하고 있다. 처음 대학원 진학에 대해 지도교수와 상담할 때 지도교수는 노골적으로 반대했다. 다른 대학원으로 진학하려고 시도했으나 그가 A대학 출신이라는 이유로 면접에서 떨어졌다. 지도교수가 부탁하지 않는 한 다른 교수의 제자를 받지 않는 것이 학계의 불문율이다. K씨는 “내키지 않는 분야를 연구하자니 진도도 잘 나가지 않는다. 박사논문까지 어떻게 쓸지 모르겠고 왜 이 분야를 연구하고 있는지 이따끔 의욕을 잃곤 한다”고 말했다.
해당 지도교수는 학계의 거목은 아니지만 어느 정도 연구성과를 인정 받은 중진 학자다. 제자들에 대한 애착도 크다. 연구를 수주해 프로젝트를 수행할 때 사비를 털어 제자들에게 수고비를 더 주기도 한다. K씨는 “인생상담이나 진로고민도 잘 받아주고 학생들에게 무리한 요구를 하지도 않는다. 모범적이고 존경할만한 사람이다”고 말했다. 그러나 권력은 유지된다.
'랩(Lab)실‘을 중심으로 운영되는 이공계열과 달리 인문계열은 개인연구에 가깝다. 그래서 반드시 논문을 쓰기 위해서는 본인의 연구시간이 필요하다. 도서관에 책더미를 쌓아놓고 밑줄 그어가며 읽어야 한다. 필요한 내용을 발췌해 잘 기록하지 않으면 주석 하나 달지 않아서 표절논란에 휩싸이기 쉬운 것이 지금의 학계다.
박사학위과정은 석사에 비할 바가 아니다. 2008년 이화여대에서 철학박사학위를 취득한 C씨는 “박사학위를 쓰는 동안 받는 스트레스는 상상 이상이다. 생리주기가 바뀔 정도로 심한 스트레스를 받는데, 이때도 지도교수의 연락은 무조건 받아야 하고 지시를 거스를 수 없었다”고 말했다. 그는 현재 대학의 글쓰기수업 시간강사로 일하고 있다.
대학원 조교나 연구실에 소속돼 있지 않은 K씨도 지도교수의 지시를 거스를 수 없다. 지도교수가 지시하기 이전에 먼저 대비하는 것은 이미 대학원생들의 덕목이다. 학회일정에 맞춰 교통편을 알아보거나 숙박시설을 체크하는 것은 기본이다. 조교가 아니지만 학부시험 답안지 채점과 감독에도 자주 동원된다. 이처럼 지도교수를 수행하는 틈틈이 수업을 듣고 과제를 수행하거나 논문을 위한 개인연구를 병행해야 한다. 박사학위 과정을 밟는 대학원생들의 경우에는 연구실적 등을 위해 지도교수의 도움을 받아 소논문을 학술지에 게재해야 한다. 대학원생들이 눈코틀새 없이 바쁜 이유다. K씨는 “문제가 되는 성희롱이나 표절강요, 개인적인 심부름 등은 아니니까 불만은 없다”고 말했다.
논문 작성을 위한 교육비 지출은 대학원생에게 큰 부담으로 작용하고 있다. 2010년부터 국내 박사학위 취득자는 매년 1만명을 넘겨 2014년에는 1만 2931명이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그러나 대학원 진학비는 여전히 정부보증 학자금대출의 사각지대에 있고, 대학들은 원할한 학사관리를 명분으로 수십만원의 수료연구비를 신설하고 있다. 이와중에 30~40만원에 달하는 개인연구 심사비와 게재비, 연회비 등의 지출부담은 고스란히 개인에게 전가된다. 일부 학술지는 정해진 분량을 초과할 경우 게재비를 더 받기도 한다. 보통 200자 원고지 120매를 기준으로 1매 초과당 5000원을 더 받는 식이다. 박사학위를 취득한 연구자나 시간강사라면 한국연구재단의 시간강사지원제도를 이용할 수 있지만 과정생은 논외다.
관계가 좋았던 지도교수라도 논문을 쓰는 시기가 되면 앙숙으로 변한다. 지난해 자살한 서울 한 대학의 국문학 박사논문과정생도 지도교수와의 관계는 가까웠다. 그와 함께 공부한 한 대학원 동문은 “지도교수와의 관계가 좋아 논문통과가 수월할 것이라고 장담하고 다닐 정도로 가까웠다”고 말했다. 그러나 연구주제와 방법론 등에서 지도교수와 마찰을 빚다가 지난해 11월 아파트 16층에서 투신했다.
논문을 작성하는 과정의 마찰은 성희롱이나 표절강요 등 명백한 범죄와는 다르다. 학문적인 마찰은 표면화되지도 않는다. 지도교수와 마찰이 심해서 고민을 토로해도 ‘사회생활 못한다’는 핀잔을 듣기 일쑤다.
K씨는 “논문의 주제나 방법론은 개성이다. 개인의 정체성이나 다름없다. 그러나 교수들은 경험과 현실을 이유로 이를 손쉽게 무시한다. 생계가 막히거나 몇 년간의 노력이 물거품이 되기도 한다. 그간 지도교수에게 종속된 시간이 아깝고 스스로가 경멸스러워지게 까지 된다”고 말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