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리 깊은 나무 바람에 아니 묄세” …미래 100년 항해 위한 대학교육 뿌리 짚기

[한국대학신문 송보배·손현경 기자] 대학이 학령인구 감소로 위기를 맞고 있다. 대외적으로는 구조개혁의 대상으로 끊임없는 혁신을 요구받고 있으며, 대내적으로는 고현철 부산대 교수의 투신 등 대학 자율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드높다. 21세기 대학은 백척간두의 위태로움 속에서 시작되고 있다. 바람이 거셀수록 뿌리 깊음이 나무의 생사를 담보하듯, 미래 대학의 성패는 과거 한 세기동안 대학이 쌓아온 철학과 지성의 깊이와 무관하지 않다. 한국대학신문은 창간 27주년을 맞아 우리나라 대학의 태동부터 현재까지 역사를 되돌아봤다. 

◆ 국민의 열망 속 탄생한 대학, 굴곡의 역사

▲ 1915년 3월 조선총독부가 사립학교규칙개정을 공포하면서 배재학당은 4년제의 배재고등보통학교로 등록됐다. 배재고등보통학교 1932년 졸업앨범 속 수학여행 모습. 중국 랴오닝성 잉커우항에서 찍었다. 사진 = 배재학당역사박물관.

민족의 암흑기, 꺼지지 않은 ‘민족 대학’의 열망 = 현재는 200여 개의 4년제 대학들이 설립, 대학 진학률이 70%를 상회하고 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에는 4년제 대학은 경성제국대학 한곳 뿐이었다. 국가기록원에 따르면 경성제국대학은 1919년 3.1운동 이후 국민들이 ‘조선민립대학설립운동’을 전개하자 일제가 한국인 주도의 고등교육기관 설립을 봉쇄할 목적으로 세웠다. 실제 교수와 학생 대부분이 일본인으로, 한국학생은 3분의 1을 밑돌았다.

광복 이후에도 교육을 향한 열망은 뜨거웠다. 대학 설립에 대한 요구가 거세지자 미군정청은 1946년 7월 13일 ‘국립서울종합대학안’을 발표하고 8월 22일 ‘국립서울대학교 설립에 관한 법령’을 공포했다. 경성제국대학을 중심으로 몇몇 전문대학을 통합해서 현재의 서울대학교가 설립됐다.

한편 일제강점기 중등·고등교육을 담당했던 전문학교들은 광복 이후 대학으로 승격했다. 연세대, 고려대, 이화여대, 중앙대, 동국대, 숙명여대 등이 이런 과정을 거쳐 현재 대학의 모습을 갖추게 됐다.

특히 배재대의 전신인 배재학당은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중등교육기관으로 주목할 만하다. 1885년 미국 감리회 소속 아펜젤러 선교사가 배재학당을 창립했다. 이듬해 고종황제로부터 배재학당(培材學堂), 즉 ‘유용한 인재를 기르고 배우는 집’ 이란 뜻의 교명 현판을 하사받았다. 배재는 배양영재(培養英材)의 줄임말로 영문으로는 ‘PAI CHAI College’로 표기했다.

6.25 전쟁으로 줄줄이 부산행… 전시에도 이어간 대학교육 = 해방과 함께 4년제 대학으로 승격된 교육기관들은 다시 위기를 맞는다. 한국전쟁의 포화는 대학들도 피해갈 수 없었다. 6월 대학들이 급히 휴교령을 내리고 학생들을 귀가시켰다. 교수와 학생들도 줄줄이 부산으로 몸을 피했다.

▲ 1950년 6.25전쟁이 발발하자 대학들은 부산 피난 중 연합강의를 이어갔다. 1950년 부산 동대신동에 자리잡은 대학 본관. 사진 = 서울대기록관 제공.

전쟁 중에도 대학교육은 어렵게 이어졌다. 1951년 문교부는 전시연합대학을 열었다. 그해 2월 서울대는 연합강의 형식으로 부산에서 수업을 이어갔으며, 4월에는 가교실 건축계획을 세웠다. 연합대학은 1952년 5월 해체됐으며 서울대는 전쟁이 끝난 1953년 9월 다시 서울로 돌아온다.

전시 상황에서 단독개교를 한 대학도 있었다. 이화여대는 1951년 1월 ‘이화의 교수들은 모이라’는 신문광고를 게재하고 전국에 흩어진 교수를 부산에 불러 모았다. 전쟁도 배움에 대한 열망은 꺾지 못했다. 그해 8월 부산에 설립된 이화여대 피난학교에는 학생 850여 명이 몰려들었다. 

4.19혁명… 교수·학생들 거리로 = 1960년 제4대 대통령·부통령 선거에서 이승만 정권은 장기집권체제 연장을 위해 부정선거를 강행한다. 3월 15일 마산에서는 이승만 정권의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대규모 시위가 열린다. 이날 경찰은 시위 진압을 위해 실탄을 발포했다. 경찰의 총격으로 7명이 사망하고 80여 명이 부상을 당했다.

산발적인 시위와 강제진압이 이어지던 4월 11일 마산 신포동 바다에서 부정선거 규탄 시위 중 사라졌던 김주열의 시신이 떠올랐다. 당시 16세 고등학생이던 김주열의 왼쪽 눈에는 최루탄이 박혀 있었다.

▲ 1960년 6월‘신생활운동’을 전개하고 있는 서울대 국민계몽대. 4·19혁명 이후 경제자 립과 생활문화 개선 목적의 범국민 운동이다. 사진 = 서울대기록관.

4월 18일 고려대 학생들은 마산 사건의 책임자 처단과 경찰의 학원 출입 금지를 요구하며 학생 시위에 나섰다. 첫 학생 시위를 벌인 고려대 학생들은 귀가 중 반공청년단의 피습을 당한다. 수십 명의 학생들이 부상을 당했고, 평화시위를 폭력으로 진압한 이 사건은 다음날 학생 시위의 확산으로 번졌다.

4월 19일 학생들은 부정선거 규탄과 마산사태의 책임자 처벌 등을 외치며 거리로 나왔다. 이날 경찰은 무차별 발포를 자행하고 이승만 정권은 계엄령을 선포한다.

학생들의 희생에 4월 25일 교수들도 거리로 나왔다. 27개 대학 교수 300여 명은 이승만 정권의 퇴진을 요구하며 국회까지 행진했다. 이 사건은 이승만 대통령이 물러나는 결정적 사건이 된다. 교수단 행진 하루 뒤인 4월 26일 이승만 대통령은 하야 성명을 발표하고, 5월 하와이로 망명한다.

▲ 1980년 5월 18일, 5.18 직전에 일어난 전남대 정문시위. 사진 = 전남대 제공.

1980년대 대학사회를 강타한 광주의 비극 =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이 당시 중앙정보부장인 김재규의 총격으로 사망하며 비상계엄령이 선포된다. 이후 12월 신군부가 들어서며 정권장악에 나선다. 신군부의 등장으로 ‘서울의 봄’은 좌절됐지만, 민주주의를 향한 학생들의 열망은 학원민주화투쟁으로 이어졌다. 1980년 3월 서울대 총학생회를 시작으로 대학마다 학생회가 속속 구성됐다.

5월 들어 학생들은 계엄령 해제를 요구하며 정치투쟁을 전개했다. 5월 10일에는 전국 대학 학생 대표들이 비상계엄 해제와 전두환 퇴진을 요구하는 성명을 발표했고, 14일과 15일에는 전국 대학생 10만여명이 서울역에 모여 가두시위를 벌였다. 각 지역에서도 가두시위가 이어졌다.

그러자 신군부는 17일 전국 55개 대학 학생대표 95명을 연행하고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 실시했다. 국회 등 기관에 계엄군이 주둔했고, 대학에는 휴교령이 내려졌다.

18일 비상계엄군이 전남대 정문을 봉쇄하고 등교를 막자 전남대 학생들은 이에 반발하며 광주시 금남로로 모여들었다. 1000여 명의 시위대는 이날 오후 3000여 명으로 불어났다. 

시위가 더욱 확산되자  계엄군은 27일 특공대를 투입, 탱크를 몰고 시내에 진입하며 시민들과 교전했다. 최소 165명(정부집계)의 민간인이 사망했다.

언로의 차단으로 은폐된 광주의 비극을 알리기 위해 30일 서강대 재학생인 김의기 씨가 서울기독교회관에서 투신하는 등 1980년대 대학 곳곳에서 5.18민주화운동을 알리기 위한 투쟁은 계속됐다.

우리 손으로 직접 뽑자, 총장 직선제 시행 = 총장을 구성원이 직접 선출하는 직선제는 1987년 목포대에서 처음 이뤄졌다. 목포대는 당시 이 대학 수장인 학장을 직선제 방식으로 선출했고, 이듬해 전남대도 직선제를 통해 총장을 선출했다. 직선제 이전까지 국립대 총장은 교육부가 임용제청해 대통령이 임명했다. 구성원의 투표과정은 없었다.

▲ 1987년 민주화 바람을 타고 국립 목포대에서 전국 최초로 직선 학장을 선출했다. 사진 = 목포대.

총장직선제가 확산되면서 선거과열 문제가 제기됐다. 파벌형성과 금품수수 등 문제가 대학가에서 벌어졌다. 그러자 2012년 교육과학기술부는 ‘국립대 선진화방안’을 통해 직선제 폐지에 칼을 빼들었다. 직선제를 폐지 여부를 정부 재정지원사업과 연계하면서 국립대학들이 줄이어 총장직선제를 간선제로 전환했다.

2015년 8월 17일 고현철 부산대 교수가 직선제 이행을 외치며 투신하면서 총장직선제 회복이 다시 대학가의 화두로 등장했다. 지난 9월 18일 1200여 명(경찰 추산 800여 명)의 교수들이 교수대회를 열며 고현철 부산대 교수 추모와 함께 대학 자율성 회복을 외쳤다. 이어 전국 국공립대학 총학생회 학생들도 지난 2일 공동행동을 통해 총장직선제 부활을 촉구하는 등 대학가에 ‘직선제 회복’을 위한 노력이 계속되고 있다.

5.31교육개혁, 문민정부에서 박근혜정부까지 = 1995년 김영삼 정부는 세계화와 다양성, 자율성을 근간으로 한 5.31교육개혁을 발표한다.

△대학설립준칙주의 △대학정원 자율화 △단설 전문대학원 설치 △대학모형의 다양화와 특성화 △대학평가 및 재정지원의 연계강화 △학부제 △국립대 법인화 등이 5.31교육개혁의 일환으로 추진됐다.

대학설립 요건을 대폭 완화한 대학설립준칙주의와 대학 정원자율화로 진학률은 크게 확대됐다. 대학 입시 역시 크게 변화했다. 국·공립대학 본고사가 폐지됐으며 대학 자율 기조 아래 다양한 입학전형이 생겨났다. 

5.31교육개혁은 국민의 정부와 참여정부를 거쳐 이명박, 박근혜 정부까지 이어졌다. 20년 동안 5개 정권의 교육정책 근간을 이뤘으나 이제 한계를 맞았다는 의견도 제기된다. 대학난립과 대학의 시장주의를 야기했다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

올해는 5.31교육개혁이 20주년을 맞으면서 5.31교육개혁의 공과를 평가하는 국회, 교육부 차원의 논의도 이어지고 있다.

학령인구 감소 따른 구조개혁 드라이브 = 2011년 7월 1일 학령인구감소에 따른 부실대학 통폐합과 퇴출 등 대학 구조개혁 방안을 논의하기 위한 ‘대학구조개혁위원회’가 발족했다. 위원회는 경영부실 대학의 통폐합, 퇴출 및 국립대 선진화 등 구조개혁 계획, 대출 제한 대학 선정안 등의 심의, 검토를 맡았다.

당시 교육과학기술부는 강력한 대학구조조정을 단행함으로써 △명신대 △성화대학 △선교청대가 패쇄됐고 자신 폐교한 건동대를 포함해 벽성대학의 퇴출로 이어졌다.

▲ 2011년 7월 5일 교과부(현 교육부)에서 열린 대학구조개혁위원회의. 사진 = 한국대학신문 DB.

재정지원 제한 대학, 대출제한 대학 등의 수순을 통한 부실 대학 퇴출을 본격화하고 국립대 역시 구조개혁 및 부실대학 선정을 위한 실사에 나서며 구조개혁 중점 추진 국립대를 지정하는 등 강력한 대학구조정의 의지를 표명했다.

대학들은 대내외적으로 학과 통폐합, 정원 감축 등 구조조정을 단행, 이에 따른 크고 작은 학내 분규가 아직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100년의 대학문화, 뭐가 있을까?

▲ 1928년 이화여대 메이퀸 대관식. 이화학당의 메이퀸은 1908년 대학 창립자 스크랜턴 부인에게‘메이퀸’이라는 상징을 헌사하며 시작됐다. 사진 = 이화여대 제공.

5월의 여왕은 누구? 메이퀸 선발대회 = 이화학당의 메이퀸은 1908년부터 시작됐다. 이화학당의 창립자 스크랜튼 부인에게 ‘메이퀸’이라는 상징을 헌사한 것이다. 1925년 이전까지 메이퀸 선발대회는 ‘미인 선발대회’라기 보다는 학교의 유공자나 존경받는 선생님들을 선출하는 행사였다.

메이퀸을 학생 중에서 뽑기 시작한 건 1927년 이후의 일이다. 졸업반 학생 중 ‘성적이 우수하고 품행이 단정하며 신앙이 돈독해 진·선·미의 이화 정신을 대표할 수 있어야 한다’는 전제 하에 학생들이 투표로 선출했다.

광복과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부활과 중단을 거듭한 메이퀸은 이화 창립 70주년인 1956년 다시 그 명맥이 이어졌다. 매달 5월 초순 각 과에서 한명씩 메이퀸 후보자를 선출했다. 교수와 동창생들로 구성된 선정위원회의 최종 심사를 거쳐 최고 득점자가 메이퀸에 등극했다.

메이퀸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과열되자 1978년 동문과 재학생을 중심으로 회의론이 불거졌다. 78년 5월을 전후로 메이퀸제도 철폐를 위한 졸업생 모임이 결성되는가 하면, 전체 과의 절반에 달하는 24개과가 과 퀸 선발을 거부해 사실상 메이퀸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100년의 라이벌, 고연전(연고전) = 고연전(주최학교에 따라 연고전, 고연전 명칭을 번갈아 사용한다. 올해 주최교는 연세대로, 올해 공식명칭에 따라 기사에는 고연전으로 표기한다)의 시작은 1925년 당시 보성전문학교와 연희전문학교의 정구대회로 거슬러 올라간다. 양교의 첫 경기였던 정구대회 이후 1927년 보-연전(보성전문-연희전문)에서 축구경기가 시작되며 고연전의 모태가 시작됐다.

▲ 1950년대 고연전 축구 서울운동장 전광판. 고연전(연고전)의 역사는 1925년 당시 보성전문학교와 연희전문학교의 정구대회로 거슬러 올라간다. 양교의 첫 경기이던 정구대회 이후 1927년 보-연전(보성전문-연희전문)에서 축구경기가 시작되며 고연전의 모태가 시작됐다. 현재와 같은 정기고연전은1965년에 정착됐다. 사진 = 고려대 제공.

현재와 같은 정기고연전은 1965년에 정착됐다. 당시 △야구 △농구 △아이스하키 △럭비 △축구 등 5개 종목의 체육교류를 확정하며 연세대와 고려대의 정기고연전이 시작됐다.

정기고연전 개최는 매년 순탄하게 이뤄진 것은 아니었다. 1971년, 1972년, 1980년은 학원사태로 개최되지 못했으며 1996년은 한총련 사퇴로 인해 개최가 중단됐다.

젊은이의 양지, 대학가요제와 통기타 스타들 = 1970년대 장발과 노출이 심한 옷은 경범죄 대상이었다. 통제와 간섭은 문화 전반에 팽배했다.  발표 음반에는 소위 ‘건전가요’가 포함됐고, 영화관에서는 애국가와 대한뉴스와 함께 국민 계몽을 위한 문화영화를 상영했다.

금기의 시대 속에서 청년들의 자유를 향한 갈망은 ‘통기타’와 ‘청바지’로 표출됐다. 대학가에는 통기타를 치는 대학생들을 흔히 볼 수 있었다. 이런 가운데 대학가요제가 큰 인기를 얻으며 대학가의 큰 문화축제로 자리잡았다.

▲ 1977년 9월 첫 개최된 뒤 2012년 막 내린 대학가요제. 사진 = 세광음악출판사 제공.

1977년 처음 열린 대학가요제는 수많은 스타를 배출했다. 서울대 농대 출신 밴드 ‘샌드 페블즈’는 1회 대회 때 ‘나 어떡해’로 대상을 받았다. 이들의 활약으로 각 대학에 스쿨 밴드가 폭발적으로 늘었다.

이어 김학래·임철우의 ‘내가’(1979), 이범룡·한명훈의 ‘꿈의 대화’(1980), 높은음자리의 ‘바다에 누워’(1985), 유열의 ‘지금 그대로의 모습으로’(1986), 작품하나의 ‘난 아직도 널’(1987), 무한궤도의 ‘그대에게’(1988) 등이 뒤를 이었다. 또 심수봉, 노사연, 배철수, 이정석 등도 스타가 됐다. 1990년대 들어 전람회, 김경호, 이한철 등이 이름을 알렸지만, 2000년대 들어서는 그룹 ‘익스’(2005) 외에 눈에 띄게 활동하는 가수가 없었다.

36년 전통의 MBC 대학가요제는 2013년 폐지됐다. 당시 MBC는 “제작비 대비 시청률 저조로 지난해 36회를 마지막으로 대학가요제가 열리지 않게 됐다”고 밝혔다.

저작권자 © 한국대학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