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우종 (본지 전 주필 / 문학평론가)
하늘과 바람과 별과 詩 - 올해는 민족 저항시인 윤동주(尹東柱) 탄생 100년이 되는 해이다. 윤동주는 1917년 12월 30일 만주 북간도 명동이라는 곳에서 태어났다. 1938년 봄 고종사촌 송몽규와 함께 연희전문(연세대)을 다닌 후 1942년 도일하여 릿교대학에 적을 두었다. 이후 동지사대 영문과로 옮겼다. 1943년 7월 귀향하기 위해 역으로 가던 중 체포돼 송몽규와 함께 후쿠오카형무소에 수감됐다. 2년형을 언도받고 복역하던 중 1944년 2월 옥사했다. 1995년 2월 본지는 후쿠오카 형무소앞 뜰에서 그를 위해 진혼제를 올렸고 이후 매년 윤동주 추모제를 열어왔다. 탄생 100주년을 맞아 운동주를 위한 특집으로 그를 기린다.<편집자 주>

[한국대학신문 한국대학신문 기자] 일본의 옛 후쿠오카 형무소 뒤뜰 니시모모치공원(西百道公園)에서는 해마다 2월 16일이 되면 시인 윤동주를 생각하는 추모행사가 열린다. 1995년 2월 한국대학신문이 50명의 추모단을 이끌고 처음으로 그곳에 간 후 시작된 추모행사다.
우리가 그를 이처럼 추모하는 이유는 우리가 그에게 너무 많은 빚을 지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 한국인은 윤동주 때문에 역사 앞에서 부끄럽지 않은 명예의 훈장을 달고 있다. 그의 이름을 부를 때는 참으로 자랑스럽다. 이것이 첫째 빚이다.
우리는 창씨개명하고 우리말과 함께 세계에서 유례가 없는 뛰어난 문자인 한글을 빼앗기며 친일문학을 하던 시절이 있었다. 그렇지만 그 시대에 윤동주가 있었기에 우리는 부끄러움을 던다. 그를 생각하면 오히려 자랑스럽기도 하다.
교토의 도시샤 대학(同志社大學)시절인 1943년 봄에 그는 전선으로 나가는 일본인 학생을 위한 환송회 자리에서 자기가 말할 차례가 되자 이렇게 말했었다고 한다.
“제군에게는 죽음을 걸고 지킬 조국이 있다. 그러나 나에게는 지켜야 할 조국이 없다.”
그 무렵에 교토 교외 우지가와로 소풍 가서 윤동주를 가운데 세우고 찍은 사진 속의 인물(영문과생 10명)중의 하나인 모리타 요시오(森田 義夫)의 증언이다.
또 윤동주 옆에서 사진을 찍은 여학생 모리타 하루의 증언도 있다. 영문과 주임교관(교수) 우에다 나오조(上田 直藏)집에서 다과회를 할 때 윤동주는 민족적 사안을 둘러 싼 어떤 얘기 끝에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나는 그런 마음으로 이 학교에 와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분명하고 당당하게 조선인으로서의 긍지와 명예를 지키겠다는 도전적 선언이었다.
그러다가 스파이라는 말까지 나오고.
그 후 약 석 달 뒤인 1943년 7월 14일 윤동주는 체포됐다. ‘재교토(在京都)조선인학생민족주의그룹사건’ 때문이다. 그리고 후쿠오카 감옥에서 1945년 2월 16일 오전 3시 36분에 옥사했다. 만 27년 2개월을 살다 갔다.
그의 죽음은 너무도 원통하지만 이것은 그가 스스로 당당하게 용기있게 선택해 나간 길이며 일제의 어떤 억압에도 굴하지 않고 이렇게 꽃잎처럼 사라져 간 시인이 있었다는 것은 우리의 역사가 부끄러움의 역사만은 아니라는 점에서 우리는 윤동주에게 빚이 있다.
둘째로 우리는 그에게 생명의 빚이 있다.
일제가 태평양전쟁을 선포하며 죽음의 피구름을 몰고 오던 날이 1941년 12월 8일인데 그로부터 18일 전인 11월 20일에 윤동주는 <서시>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죽어가는 것을 사랑한다는 것은 죽어가는 것을 그로부터 구하겠다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지만 그가 몸을 던져서 죽어가는 것을 구하겠다고 선언하고 그 길을 가 주었다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그에게 생명의 빚을 지고 있다.
그것은 지금 가해자의 나라 일본 도처에서 일어나고 있는 그에 대한 사랑과 추모에서 더욱 입증되고 있다.
갖 피어나던 소녀들을 벌레처럼 짓밟고 죽음으로 몰아넣기도 하던 그들로부터 사과 한마디 받아내지 못한 채 도장 찍어 주고 짝짜꿍이 되자고 놀아나는 오늘의 위정자가 있고 군국주의가 부활하는 이 시기에 후쿠오카와 교토 등에서 굳이 윤동주 시비 건립운동이 일부 일본인들로부터 일어나고 있는 것은 생명을 구하기 위해서다. 다시는 그처럼 피구름이 몰려오지 않도록 자국민들과 온 세상 사람들에게 시비를 통해 역사를 가르치겠다는 것이다. 일본에 이미 최초로 세워진 윤동주시비는 한국대학신문이 적극적으로 추진한 결과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윤동주에게 생명의 빚을 지고 있다.
셋째로 우리는 새로 태어남의 빚을 지고 있다.
‘모든 죽어가는 것’의 하나로서 가해자로부터 생명을 구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생명은 어머니 탯줄을 끊고 울음을 터뜨릴 때부터 너무도 불완전한 존재이기 때문에 수없이 다시 태어나야 한다. 윤동주는 이 생명이 어떻게 태어나야 할 것인지 가장 기본적인 방향을 가르쳐 주고 있다.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서시>에서)
그런데 1994년 NHK 디렉터 시절부터 지금까지 20여 년 동안 미친 듯이 윤동주의 발자취를 찾으며 살아 온 다고기치로(多胡吉郞)는 이 한 마디에 꽂혀서 험한 길만을 찾아 헤매는 고달픈 순례자가 되었다.
그는 필자에게 이렇게 고백했다. 윤동주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고 한 시구를 만나면서 어느 날 문득 자문했다고 한다. ‘그러면 나에게 주어진 길은 무엇인가?“ 하고.
그런 후 그는 NHK 직장을 내던지고 윤동주만을 찾아다니며 배고픈 백수가 되었다. 그는 누군가로부터 그에게 주어진 나만의 길을 그렇게 찾은 것이다, 그리고 참으로 귀중한 연구업적을 한국의 문예지 ‘창작산맥’에 연재했다.
우리는 모두 누군가로부터 주어진 길이 있고 그 길을 가야 한다는 사명감이 있음을 아는 것은 참으로 큰 깨우침이다. 우리가 이 사실을 윤동주로부터 배우고 다고기치로처럼 새로 태어난다면 이것은 참으로 큰 빚이다.
한국대학신문이 처음으로 그의 영혼이 오열하는 자리에 가서 추모행사를 가진 후 이런 일은 날이 갈수록 가해자의 나라 일본에서 널리 확산되고 우리도 물론 마찬가지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이 사실을 두고두고 많은 사람에게 전하며 긍지를 가져도 좋다.
올해 윤동주 탄생 100주년을 맞으며 더욱 그를 찬미하고 그가 있었기 때문에 이 땅을 사랑할 수 밖에 없게
되었다고 감히 말해도 좋을 것같다.

글· 그림= 김우종(전 본지 주필· 문학평론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