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 잃은 설움’ ‘건강한 국민이 주권회복 열쇠’ ‘교육 받은 사람이 사회에 기여할 수 있다’
‘경제 성장 절정’ 1970년대 후반 유한공업전문학교 설립…공업·정보·디자인 등 22개 학과 유한대학교로 발전

유일한 박사 (사진=유한대학교)
유일한 박사 (사진=유한대학교)

[한국대학신문 김의진 기자]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 1919년 3·1 운동 소식이 미국에도 전해졌다. 서재필이 주도하는 필라델피아 ‘한인자유대회’에 한 청년도 동참했다. ‘한국 국민의 목적과 열망을 석명(釋明)하는 결의문’을 낭독했다. 유일한 박사가 조국의 국권 회복과 독립을 위한 본격적인 행보를 넓히기 시작한 것이다.

태평양전쟁이 발발하자 미국에서는 아시아 관계 전문가가 필요하게 됐다. 유일한 박사는 조국의 해방과 독립을 갈망하고 있었고, 고문직을 맡아 헌신했다. 재미 한인들로 구성된 맹호군 창설의 주역이 됐던 것도 조국의 독립을 위한 일념 때문이었다.

8·15 해방을 수개월 앞둔 1945년 유일한 박사는 미 육군 전략처(OSS, 현 CIA의 전신)에서 시도한 냅코작전(NAPKO Project)에서 제1조 조장으로 활약했다. 냅코작전은 민족의식이 투철한 재미 한인을 선발해 훈련을 시킨 뒤 한국 내에 침투시키는 특수공작이었다. 하지만 이 작전은 일본의 항복으로 실행에는 옮기지 못했다.

유일한 박사의 애국·애족 정신은 그가 설립한 제약회사 유한양행 경영의 기본 이념으로도 확인할 수 있다. 미국에서 설립한 라·초이 식품회사로 유일한 박사는 성공을 경험하게 됐지만, 일시 귀국했던 조국에서 비참한 현실을 보게 된다. ‘건강한 국민만이 잃었던 주권을 되찾을 수 있다’고 믿은 유일한 박사는 1926년 12월 10일 서울 종로2가에 유한양행을 설립했다. 조선 최초의 제약회사가 세워진 순간이다.

유한양행 창립 당시부터1929년까지 사옥으로 사용됐던 덕원빌딩의 모습(왼쪽)과 유한양행 YMCA 사옥(오른쪽). (사진=유한대학교)
유한양행 창립 당시부터1929년까지 사옥으로 사용됐던 덕원빌딩의 모습(왼쪽)과 유한양행 YMCA 사옥(오른쪽). (사진=유한대학교)

유일한 박사는 유한양행이 확실한 기반 위에 서자 회사의 소유권을 다른 사람들에게 나눠주겠다고 결심한다. 그는 기업은 개인의 것이 아니라 사회의 것이며 사원의 것이라는 뜻에서 주식의 일부를 사원들에게 공로주로 나눠주기로 결정했다. 우리나라 최초 ‘사원지주제’가 시행된 순간이다.

또한 애국정신과 직결되는 창립자의 납세관에 따라 유한양행은 ‘정직하고 조속한 납세’를 지상 시책으로 삼고 실천, ‘한국 유일의 자진납세업체’ ‘한국 유일의 장부공개업체’ 등으로 높은 평가를 받았다.

유일한 박사는 기업 경영 못지않게 인재 양성도 중히 여겼다. 그 가운데서도 그는 우리나라에 절대적으로 부족한 기술인력 양성을 위한 전문기관의 필요성을 실감했다. 1957년 소사에 고려공과학원을 설립하고 전 학생에게 학비와 숙식비를 무료로 제공하며, 기술인력 양성에 전념했다. 1961년 학교 이름을 한국직업학원으로 고치고, 1964년 3월에는 한국고등기술학교로 바꿨다.

이어 같은 해 12월에 영등포구에 교사를 신축하고, 유한공업고등학교로 새롭게 발족했다. 기계과와 전기과, 건축과, 자동차과 등을 설치하고 학생 전원에게 장학금을 지급했다. 기업의 사회적 책임 가운데 하나로 교육사업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여겼던 유일한 박사는 교육사업에 더욱 심혈을 기울였다.

특히 유일한 박사는 생전에 연세대 재단에 자신이 소유하고 있던 주식 4만1000주를 기증했으며, 유한공고에 4만주, 보건장학회에 1만7368주 등 여러 교육재단에도 주식을 기증했다. 단 ‘의료복지와 교육을 위한 목적 이외에는 주식을 매매할 수 없다’는 단서를 붙이며, 자신의 뜻이 사후에도 왜곡되지 않도록 했다.

1963년 유일한 박사가 연세대에 주식을 기증하는 모습. (사진=유한대학교)
1963년 유일한 박사가 연세대에 주식을 기증하는 모습. (사진=유한대학교)
1971년 조선일보와 중앙일보에 각각 보도된 유일한 박사의 유언장 내용. (사진=유한대학교)
1971년 조선일보와 중앙일보에 각각 보도된 유일한 박사의 유언장 내용. (사진=유한대학교)

그는 단순히 재산을 사회에 돌려준 게 아니라 기업을 사회에 내놓았다. 또한 기업은 지속적으로 사회를 위해 봉사하지 않으면 존재가치가 없다고 믿었다. 그는 혈족에게 기업을 물려주지 않았으며, 그의 유언장에서도 이러한 정신을 발견할 수 있다.

1.손녀 유일링에게 대학까지의 학자금으로 1만 달러를 준다.
2.딸 재라에게는 유한공고 안에 있는 묘소와 주변 땅 5000평을 물려준다.
3.자신 소유 유한양행의 주식 14만941주는 한국사회 및 교육원조신탁기금에 기증한다.
-유일한의 유언장 내용-

아들 유일선에게는 아무것도 남겨주지 않았다. 대학까지 가르쳤으니 혼자 살아가라는 말만 있었다. 딸 재라에게 물려준 땅도 상속이라기보다는 일종의 부탁에 가까웠다. 그 땅을 유한동산으로 가꿔 줄 것과 주변에 울타리를 치지 말 것을 당부했기 때문이다. 그는 유한공고 교정에 묻혀 지하에서나마 마음껏 뛰어노는 학생들의 모습을 보고 싶다고 했다.

■‘유한공업전문학교’ 설립…유한대학교로 발전 = “교육을 받은 사람은 능력이 개발돼 사회에 기여할 수 있으나, 교육을 받지 못하면 잠재한 능력은 빛을 보지 못하고 시들어 버린다. 어느 정도를 아느냐, 그것이 문제가 아니다. 아는 것을 어떻게 이용하느냐, 이것이 문제인 것이다.”

현재 유한대학교의 모습. 학생들 뒤편에 동상이 유일한 박사의 기념동상. (사진=유한대학교)
현재 유한대학교의 모습. 학생들 뒤편의 동상이 유일한 박사의 기념동상. (사진=유한대학교)

1970년대 후반은 우리나라의 경제 성장이 절정에 달한 때였다. 공업전문학교 졸업생의 취업기회가 크게 증가했고, 전문학교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달라진 때였다. 이러한 시기에 학교법인 유한학원은 유한공업전문학교의 설립계획을 제출하고 설립인가를 받게 됐다.

초창기의 공업전문학교로서 유한공업전문학교의 경영은 성공적이었다. 하지만 국가 시책에 따라 1979년 유한공업전문학교가 설립된 지 1년 만에 유한공업전문대학으로 돌연 개편하게 됐다. 전문대학으로 승격된 셈이다.

유한공업전문대학으로의 승격은 질적 향상을 전제로 한 것이었으므로 교수 수는 45명으로 증가했고, 도서관이 신축됐으며, 교수 연구실도 마련돼 전문학교 때와는 분위기가 사뭇 달라졌다.

1980년대 정치적 혼란이 학원가에 밀어닥치기 시작하면서 유한공업전문대학도 휴교와 개교를 반복하는 등 혼란의 시기를 겪었다. 학교가 안정을 되찾은 것은 1985년께부터다. 이때부터 학생들의 취업률이 신장됐고, 지원율도 회복세를 되찾았다.

1990년대에도 발전과 도약이 계속 시도됐다. 이에 1991년 12월 유한전문대학으로 개편 인가를 받게 된다. 정보화 시대를 맞아 이미 설치돼 있던 컴퓨터정보과를 강화하면서 정보통신, 경영정보, 컴퓨터제어 등 IT 분야의 학과를 증설했다.

현재 유한대학교는 산업 사회의 기초가 되는 공업 계열과 미래 사회를 선도하게 될 정보 분야 및 디자인 계열을 중심으로 22개 학과를 운영하고 있다.

유한대학교는 50년에 걸친 공업교육경험과 시대변화에 앞장서온 역사와 전통을 가지고 있는 민족대학으로 우뚝 섰다. 또한 기술에 앞서 인간됨을 강조한 ‘교양을 갖춘 기술인’을 교육의 지표로 삼고 있다. 유한대학교는 유일한 박사의 숭고한 정신과 이를 계승․발전시켜 온 역사를 통해 젊은이들의 미래를 약속하고 있다.

유한대학교 전경.
유한대학교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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