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형섭 전 교육부 장관(전 교총 회장)
지난 3월 말 본지 1면 상단에 실린 사진과 캡션에 나는 눈이 쏠렸다. 국내 대학에 유학 중인 미얀마 학생들이 촛불을 들고 고국의 민주화 운동 희생자들을 애도하며 평화를 기원하고 있는 눈물겨운 장면이었다. 보면 볼수록 그들의 애달픈 심정이 내 가슴에 와닿는다. 불길한 상황 전개를 예견하면서도 동참하지 못하고 고민할 수밖에 없는 미얀마 국내외 일부 우국 청년들의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심정을 나는 누구보다도 절절하게 실감하고 있다. 61년 전 4·19 때 나의 심정도 그러했기 때문이다.
미얀마의 비극이 불붙기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나는 난징 조약에 따라 155년간 영국의 통치와 일국양제(一國兩制) 하에 살았던 홍콩의 대학생, 시민들의 반중 궐기에 빠져들었다. 그들은 범죄인 소환법을 반대하고 홍콩의 자치권 확보를 요구하며 캐리 람(Carrie Lam) 행정장관의 사퇴를 주장했다.
나는 그 속에서도 4·19 때 내 모습을 회상했다. 그때 나는 광화문 한복판에 서서 시위대를 태운 트럭이 정부의 부패와 무능을 규탄하고 이승만 정권의 퇴진을 외치며 동서남북으로 종횡무진하게 질주하는 모습을 지켜만 보고 있었다. 동시에 지근거리에서 불길에 타오르고 있는 서울신문사의 방화 현장도 목도하기만 했다. 그로부터 32년 뒤 내가 바로 그 신문사의 사장으로 취임하리라고는 꿈에도 예상을 못했다.
4·18 고려대 학생 시위는 마산 김주열군의 처참한 피살 보도로 격양된 젊은이들의 노도와 같은 행렬이었다. 선두에는 당시 고대 학생처장 현승종 교수가 있었다. 그 분이 이후 34년 세월이 흐르는 동안에 국무총리를 거치고 K대 이사장이 되면서 나를 그 대학의 총장으로 임명할 줄 누가 알았겠는가.
세월의 힘이란 그리도 무섭다. 그런데 나는 그때 그 현장까지 나갔으면서도 왜 함께 그 트럭에 올라타지 못했으며 시위 군중 속에 뛰어들어 스크럼도 함께 짜지 못했는가.
안타깝게도 그때 나의 신분은 군인이었다. 육군사관학교 교수부 사회과학처 정치학과 교관이었다. 현역 육군 중위 신분이었다. 매주 화요일, 목요일에는 군 정복 차림으로 태릉에 위치한 육사에 출근해 하루에 90분 강의를 두 차례씩 해야만 했다. 교재는 허만 뷰크마의 《현대 외국정치론》(1953)이었다. 강의를 통해 내가 육사 4학년 생도들에게 지속적으로 주창했던 것은 군의 정치적 중립이었다.
다행히 당시 나는 학교 본부의 교수요원 양성 정책과 교수부 관행에 따라 민간대학원에서 학위과정을 밟고 있었다. 그래서 매주 3일(월, 수, 금)은 사복으로 갈아입고 학생 신분으로 살았다. 이러한 이유로 한밤중에 서대문서 형사 두 명이 나를 검은 지프차(jeep)에 실어 강제 연행하는 해프닝도 있었다. 나를 Y대 민주화 운동권의 최고사령탑으로 오해했던 것이다.
기본 신분이 군인인 이상 어떠한 정치적 행보도 용납될 수 없다는 것이 나의 신조였다. 바로 그 신조 때문에 정치 편향적 연설을 한 아무개 삼성장군을 비난했다가 적발돼 군법회의 회부 전에 살아난 일도 있었다. 그랬던 만큼 4·19 당시 나는 세종로 한복판에 서서 나 자신을 애써 진정시키고 있는 것이었다.
그날의 세종로 일대는 최근 홍콩, 미얀마에서 보는 민중의 노도와 다를 바 없었다. 민주화를 부르짖는 피맺힌 구호도 다를 바 없다. 그러니 뉴스를 접하면서 어찌 내가 4·19 그날 그 자리를 떠올리지 않을 수 있겠는가.
바로 눈앞에서 대형 화재가 발생했다. 상황으로 보건대 방화임이 틀림없다. 지금의 서울신문사(프레스센터)에서 시뻘건 불길과 검은 연기가 솟아오른 것이다. 틀림없이 어용신문의 비민주적, 관변일변도 언론행태에 대한 민주시민의 징벌적 방화였을 것이다. 4·18 고대생 시위대에 대한 폭력 기습으로 악명 높은 대한반공청년단도 함께 분노한 자유시민들의 징벌 표적이었다.
이승만 대통령의 하야를 외치며 경무대(지금의 청와대)로 진격하고자 했던 4·19 학생, 시민 시위대를 향해 경무대 경찰서장 곽영주의 발포 명령으로 사상자가 속출했다. 사망자 185명, 부상자 1500명이 발생했다. 숨막히는 상황 속에서 만약 송효찬 계엄사령관이 이승만 정권의 무력동원 요청을 거부하지 않았더라면, 그리고 4월 25일 300명 교수단이 학생들의 반정부 시위에 동참하지 않았더라면, 그리고 월터 매카나기(Walter P. McConaughy) 주한 미국 대사가 이승만 대통령을 마지막 골든타임에 면담·진언하지 않았더라면 이 나라의 운명은 어찌됐을까.
그래서 오늘의 미얀마 상황이 시시때때로 나의 회상을 61년 전 4·19로 되돌리고 있는 것이다. 어쩌면 미얀마 반군부 사태는 군부의 소수민족 학살과 외세를 등에 업은 1936년의 스페인 내전, 1950년 한국전쟁처럼 확대되지 않을까 걱정이다.
4·19혁명이 4월 28일 민주적이며 합리적인 허정(許政)의 과도정부가 성공적으로 임무를 수행했고 6월 15일 제2공화국의 평화적인 출범, 민주적인 정권 창출로 이어졌음을 우리 민족은 역사적 긍지로 간직해야 한다. 그 중심에 4·19 학생 의거가 있었고 이것이 내각책임제와 양원제라는 새로운 체제의 제2공화국을 탄생시키는 혁명적 동력으로 작동했던 것도 아울러 기억돼야 한다.
그래서 더욱 해마다 이맘때가 되면 그 역사적 격동기에 나는 어디에서 무얼 했는가를 괴롭게 자문자답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 ‘살며 생각하며’는 대한민국 저명인사의 인생 스토리와 철학, 경험담을 소개하는 코너입니다. 이번 ‘살며 생각하며’에는 윤형섭 전 교육부 장관(전 교총 회장)이 함께 합니다.
■윤형섭 전 교육부 장관은...
연세대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했다. 연세대와 미국 존스 홉킨스대에서 정치학 석사학위, 연세대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연세대 교수로 재직하면서 학생처장, 사회과학대학장, 행정대학원장 등 주요 보직을 맡았다. 한국정치학회 회장, 한국교원단체총연합회 회장, 건국대 총장, 호남대 총장, 교육부 장관 등을 역임했다. 연세대 명예교수다.
<한국대학신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