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대학신문 김의진 기자] 군사정권에 저항해 온몸으로 희생자들과 민중의 아픔을 달랬던 고(故) 이애주 서울대 명예교수는 ‘민주화 시대의 춤꾼’의 상징과도 같다.
넘쳐나는 민주화 요구가 분출됐던 당시 대학의 교정과 거리의 시위 현장에는 건강한 민중성을 형상화한 문화공연이 늘 함께했다. 이 가운데에서도 1987년 민중항쟁의 도화선이 됐던, 군사정권에 저항하다 목숨을 잃은 고 이한열 열사의 장례식 날, 이애주 교수가 그곳에 있었다.
시청 앞에 운집한 100만 명의 시민 앞에서 이한열 열사의 넋을 달래는 이애주 교수의 ‘한풀이춤’ 살풀이는 당시 많은 국민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이보다 한 달 전 6월에도 이애주 교수는 민주화 평화대행진 출정식 당시 바람맞이 춤을 펼쳤다.
중요무형문화재 ‘살푸리’ 춤의 전수자이기도 했던 이애주 교수는 우리 시대의 중요한 시기마다 민주화를 열망하는 민중의 희망과 한을 춤사위에 담아냈다. 저항문화의 상징으로 이애주 교수가 기억되고 있는 것은 이러한 고인의 순간들이 역사에 기록돼 있는 까닭이다.
이애주 교수는 1947년 10월 17일 서울에서 태어났다. 유치원에 들어갔을 때부터 이미 춤에 소질이 있었다. 이애주 교수가 초등학교에 입학한 뒤 곧 어머니의 손에 이끌려 당시 국립국악원에서 무용강사를 전담했던 김보남 씨에게 맡겨졌다. 이 당시 그는 춤동작의 기본인 승무는 물론이고 궁중정재와 춘앵무, 검무 등에 이르기까지 익히게 된다.
이후 서울대 체육교육과를 졸업하고 대학원 과정까지 마친 뒤 그는 문리대(인문대학) 국어국문학과에 학사 편입해 공부하며 전통 민속춤에 대한 이론의 바탕을 쌓게 된다.
1969년에 살풀이춤과 승무의 대가였던 고전무용가 한영숙 씨를 만나 그에게 완판 승무를 익히게 되면서 이애주 교수의 춤판 인생은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된다. 1970년대 들어 그는 다시 다섯 명의 스승을 만나 춤사위를 살찌우게 된다. 1990년대에 고구려 벽화에서 우리 춤의 원형을 발견하고 연구해 ‘영가무도’를 익히기도 한 그는 자신만의 춤 세계를 구현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2003년 만해대상(예술부문)과 2013년 옥조근정훈장 대통령상, 2017년 제7회 박헌봉 국악상, 2019년 제1회 대한민국 전통춤 4대명무 한영숙상 등을 받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