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형섭 전 교육부 장관(전 교총 회장)

1987년 드디어 6·29 민주화 선언이 발표됐다. 대통령 직선제 약속이었다. 한국 민주정치의 제도적 안착이라 하겠다. 이는 동시에 하나의 정신적 쓰나미가 되어 우리 사회의 모든 조직과 단체를 덮쳤다.

학원의 민주화와 총장의 직선제 도입도 그중의 하나라 하겠다. 대한교육연합회(현 한국교원단체총연합회)라고 해서 예외일 수는 없었다. 1947년에 창설된 대한교육연합회(이하 교련)는 40년간 성장하면서 회원 26만 명을 끌어안은 이 나라 유일의 합법적인 교직단체였다.

바로 그 무렵의 정치적·사회적 격랑 속에서 제21대 정범석 회장이 돌연 사퇴를 선언했다. 며칠 뒤 교련의 열성적인 원로 몇 분이 나를 찾아왔다. 정 회장의 후임자를 물색 중인데 “윤 교수님이 최적의 후보자로 뜻이 모였으니 수락해 달라”는 것이었다.

나는 어안이 벙벙했다. 꿈에도 상상치 못했던 일이었다. 그들은 입을 모아 “교수님이 그간에 쓰신 학술 논문과 언론기고문, 그리고 특강에서 했던 내용, 그대로만 하면 됩니다”를 되풀이했다. 그분들의 대표 H 씨와는 초면, 생면부지의 사이였다. 나보다 연상의 중후한 인격의 인물이었다.

그분이 말한 학술 논문이란 10여 년 전에 발표했던 ‘대한교련의 구조와 이익표출활동에 관한 연구(1975년)’였다. 이 논문에서 미군정하에서 출범했던 대한교련의 설립 경위와 성장과정, 권위주의 색채가 농후한 구조적 특징, 어용적인 조직행태와 평교사의 참여가 미흡한 내부적 정책 결정 과정, 그리고 효율성이 부족한 이익표출 활동의 양태와 실적 등을 분석하고 부정적으로 결론을 내렸다. 교련은 물론 문교부(현 교육부)에서도 몹시 불쾌하고 불편해했다는 소식이 있었다.

그러나 그 논문을 안 쓸 수 없는 운명적인 사정이 있었다. 1973년 어느 날 Y 대학교 교육대학원장으로부터 소속 원생의 석사학위 논문지도교수 의뢰가 왔다. 그 원생은 서울 모 고등학교의 K 교감이었으며 논문 제목은 ‘대한교련과 교원 간의 일체성에 관한 연구’였다.

나는 열성껏 지도했다. 그는 서울의 초·중·고 교사에 대한 설문조사 결과를 원자료로 삼고 계량분석접근법을 시도해 지극히 냉정하고 객관적인 결과를 도출했다. 예컨대 “교련이 교원들의 경제적 지위 향상과 교권 옹호 활동을 하고 있느냐”는 질문에 동의한 교원이 겨우 응답자의 9%에 불과했으니 말이다.

얼마 후 K 교감이 다시 찾아왔다. 그간 몇 차례 교육위원회(지금의 교육청)에 소환됐고, 결국 인사상 불이익처분을 받았다는 것이었다. 바로 그 순간 나는 “좋소, 정 그렇다면 내가 교감 논문의 후속편을 쓰리다”라고 다짐했다. 그렇게 해서 태어난 논문이 바로 앞에서 말한 1975년의 논문이다.

H 씨를 비롯한 교련 충성파들은 내게 회장으로 취임해서 현재의 교련을 논문과 그 밖의 글에서 밝힌 대로 환골탈태해달라고 부탁했다.

이 말은 감격과 함께 부채감으로 다가왔다. 왜냐하면 대한교련에서 간행하는 새한신문에 이미 ‘교련의 과제(1979년)’ ‘교련 활성화의 조건(1983년)’ 등 여러 편의 개혁적 논설을 발표했을 뿐만 아니라 주요 일간지에도 ‘오염되는 교육(조선일보 아침논단, 1984년 6월 12일)’을 비롯해 여러 차례 교육과 정치에 대한 소신을 밝힌 바 있기 때문이다. 이에 더해 동아일보는 ‘온 가족 모이면 작은 교련’이란 제목의 대형 탐방 기사(1983년 1월 4일)를 게재하기도 했다. 우리 집안에 전·현직 교사가 26명이나 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글을 보고 교련 내부에서 서로 협의한 끝에 이들이 나를 찾아온 것이었다. 제안을 회피하거나 사양할 명분을 찾을 수 없게 돼 버렸다. 결국 내가 ‘언행일치하는 지성인다운 교수’로 남을 것이냐, 아니면 ‘실천도 못 할 탁상공론만 되풀이하면서 독자들과 대중의 말초신경만 자극하는 무책임한 백면서생’이 될 것이냐의 갈림길에 서게 됐다.

500명에 가까운 인원이 참석한 전국 대의원 대회(11월 16일)에서 75%의 득표로 당선이 확정 발표되면서 바로 기자회견이 열렸다. 그 자리에서 거듭 밝혔던 정책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았다.

①교육의 정치로부터의 독립 ②교권의 보호 ③교원의 경제적, 사회적 지위 향상 ④이익표출구조로서의 역할 ⑤교원의 지위 향상을 위한 특별법 제정 ⑥교련 내부의 권위주의적 문화의 혁파 ⑦단체교섭권의 확보 ⑧남북한 평화 통일을 위한 교육의 기여 등이 그것이었다.

회장 취임 후 전국의 모든 학교에 분회를 설치하고 분회장을 그 학교 소속 회원들이 직접 선출토록 제도를 개혁했다. 갑자기 전국에 1만 2000명의 분회장이 탄생했다. 그들에게 학교 분회의 자율권을 부여함으로써 교련 조직의 허약했던 하반신을 강화토록 도모했다.

7000부를 발행했던 새한신문을 30만 부를 발행하는 한국교육신문으로 확장했다. 교련이 안팎으로 소통하는 통로를 넓혔다. 이런 과정으로 성과를 거둔 것이 서울 잠실체육관에서 개최된 전국교원대표자대회였다. 참석자가 무려 1만 3000명이었다. 40년 전 교련 창설 이래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교련을 환골탈태하는 혁신사업이 그리 쉽게 완결될 수는 없었다. 결국 2년간에 걸쳐 모든 준비 작업을 완결한 다음 교련의 간판을 내리고 전교조에게도 손을 내밀면서 한국교원단체총연합회(교총)를 새로이 탄생시켰던 것이다. 나는 결국 교련의 마지막 회장이 됨과 동시에 교총의 초대 회장으로 추대됐다.

그 기간 참으로 고통스러운 산전수전을 겪었지만, 내가 걸어간 그 길은 앞에서 말한 사연으로 인해 피할 수 없는 선택 즉 운명적인 선택의 길이었다. 오늘날까지의 33년간을 돌아보니 그 운명적인 선택이 스스로 선택했던 운명의 길로 내 생애를 굳혀간 획기적 사건이었다. 90년 한평생을 겪고 보니, 인생은 결코 선택만도, 운명만도 아니더라는 얘기다.

※ ‘살며 생각하며’는 대한민국 저명인사의 인생 스토리와 철학, 경험담을 소개하는 코너입니다. 이번 ‘살며 생각하며’에는 윤형섭 전 교육부 장관(전 교총 회장)이 함께 합니다.

■윤형섭 전 교육부 장관은...
연세대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했다. 연세대와 미국 존스 홉킨스대에서 정치학 석사학위, 연세대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연세대 교수로 재직하면서 학생처장, 사회과학대학장, 행정대학원장 등 주요 보직을 맡았다. 한국정치학회 회장, 한국교원단체총연합회 회장, 건국대 총장, 호남대 총장, 교육부 장관 등을 역임했다. 연세대 명예교수다.

<한국대학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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