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형섭 전 교육부 장관(전 교총 회장)

나는 1988년 11월 대한교육연합회의 회장으로 선출된 후 전임자의 잔여임기 2년을 혼신의 힘을 기울여 봉사했다. 참으로 고통과 보람의 세월이었다. 

무엇보다 고통스러웠던 것은 33만 교원 중 26만이 회원으로 가입돼 있는 전국 최대의 유일하고도 합법적인 교직단체임에도 불구하고 그에 걸맞는 사회적 신뢰와 존경이 없다는 것이었다. 대한 교련 설립의 신성한 목적은 아랑곳없이 단지 정권 수호를 위한 외곽단체로써 어용단체일 뿐이라는 비판적 인식이 일부에서나마 번지고 있었다. 전교협과 전교조도 그러한 인식과 정치·사회적 환경의 소산이라 할 수 있다.

그럴수록 대한교련 회장으로서 전국의 경향 각처를 돌며 교원 상대의 강의와 대담을 이어나갔다. 교련 사무국의 통계에 의하면 나와의 대면·접촉 교원의 수가 무려 5000명에 이른다 했다. 그러다 보니 전무후무한 체험을 겪은 일도 더러 있었다. 

어느 날 아침 일어나보니 목소리가 사라졌다. 가슴이 덜컹했다. 그날도 소속 대학에서 오전에 강의를 끝내고 오후엔 지방의 교원단체 모임에 가서 연설을 해야 할 형편이었는데 음성소멸이라니! 마이크를 입속에 깊숙이 집어넣다시피 했다. 헉헉하며 쉰 목소리로 겨우 임무를 수행했다.
 
그뿐만이 아니다. 이날도 역시 지방 도시에서 교원대표들과의 대담을 끝내고 오후 늦게 교련회장실이 있는 광화문 시대로 돌아왔다. 어럽쇼! 근 20명의 교사들이 회장 비서실 바닥에 빼곡히 앉아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C여상고의 회원들이라며 교련에서 탈퇴하겠으니 회비를 반환해달라는 것이었다. 크게 실망했다. 

“우리 모두 교육자들이니 교육자답게 법과 상식에 따라 냉정하게 논의하자”고 설득했다. 그들은 막무가내였다. 

또 하나, 어느 날 야심한 시간에 전화가 걸려왔다. 현직 교장이라 했다. 만취한 상태에서였다. 교원의 62세 정년제(교육공무원법 제47조)와 교장의 4년 임기제(교육공무원법 제29조2항, 1차 중임 가능) 도입으로 인한 피해당사자들의 울분을 그 왁자지껄한 주석에서 곧바로 신임회장인 내게 토해내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문제는 이미 기정사실화된 정책으로서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한 고통들은 회장인 내가 홀로 몸으로 겪으면 끝난다. 그러나 당면한 중대 현안이 너무 많았다. 무엇보다도 조직의 내부적인 응집력과 대외적인 영향력을 높이는 일이 급선무였다. 그 동력을 전국 1만 2000개의 학교 분회와 한국교육신문에서 구하고자 했다.

한국교육신문의 전신은 새한신문이었는데 그때나 이때나 발행 부수는 7000부였다. 무려 26만 명의 회원을 가진 조직의 기관지가 고작 7000부 발행이라니 아연실색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①신문사 경영의 혁신을 선언하고 발행 부수를 30만 부로 확장토록 지시했다. ②전 회원에게 두메산골과 어촌에 이르기까지 자택으로 배달할 것 ③나머지 4만 부는 전국의 모든 학교와 청와대, 행정부, 국회, 정당을 포함한 정치권과 언론기관 및 우리 사회의 여론 형성층에 무료로 배포토록 했다. 그럴 경우 신문의 우편 배달료만도 연간 7억 원이 소요된다고 했다. 그 밖에 상당액의 부수 경비가 발생해 예산상 불가능하다며 실무진의 반발과 우려가 많았으나 K 사장이 취임해 독립·책임 경영을 하면서 광고 수입과 위탁사업의 수주량이 증가해 불과 2년 내에 기대 이상의 성과를 올렸다.

또 하나의 큰 사업은 교련이 광화문 시대의 막을 내리고 우면동 교련회관의 문을 여는 일이다. 이 일은 내가 취임하기 전에 전임회장들에 의해서 이미 착수돼 상당한 정도의 진척이 이루어진 상태였다. 문제는 건설공사가 중단돼 있었다는 사실이다. 교련의 재정난으로 인해서 건설사에게 기성고 대비 중도지불약속을 이행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자금을 조달해 겨우 준공은 했으나 46억 원의 채무를 감당해야만 했다. 그나마 교직 사회의 큰 경사가 아닐 수 없었다.
 
1989년 여름철 들어서면서 회관 2층 세미나실에 전국에서 모인 60여 명의 교련 이사들이 노태우 대통령 일행을 정중히 맞았다. 조순 경제부총리, 정원식 문교부 장관, 이연택 교육·행정 수석을 비롯한 십여 분의 중요 인사들이 수행했다. 근 20분에 걸친 브리핑의 말미에 “자손 대대로 이용될 이 건물의 건축비 중 120여 억 원을 현직 교련회원들이 감당했으니 채무 46억 원은 국가가 감당해야 마땅하다”고 역설했다. 즉석에서 대통령의 확답을 받았다. 뒤이어 국회 예산 특위 소위원회에 출석해 같은 논리를 주장했다. 채무는 청산됐다.

또한 ‘교원의 지위 향상을 위한 특별법’ 제정도 풀어야 할 숙제였다. 이 법의 성취를 위해서 교련은 다방면에 걸친 로비활동과 입법 압력을 행사했다. 1989년 5월 20일의 전국교육자대회(4000명 참석)와 1990년 5월 22일의 전국분회장 및 교원대표자대회(1만 2000명 참석) 등에서 한결같이 내건 정책목표의 첫 번째가 교원지위향상법 제정이었다. 이 과제는 공교롭게도 내가 교육부 장관에 취임한 후에야 완결됐다.
 
1990년 12월 26일 밤 11시 50분, 뜻밖의 전화를 받았다. 노태우 대통령을 최측근에서 보필하고 있는 N 씨였다. “교육부 장관으로 임명됐으니 내일 아침 9시 반까지 청와대로 들어오라”가 전부였다. 도저히 수락할 수가 없었다. “아니요. 내가 교총전국대의원대회에서 만장일치로 더구나 기립박수를 받으면서 3년 임기의 교총 회장에 추대된 것이 불과 20여 일 전인데 어찌 내가 그 자리를 떠날 수 있단 말이요?”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의 분노 섞인 폭발적인 바리톤이 쏟아졌다. “교총이 더 큽니까, 대한민국이 더 큽니까? 어느 쪽이 더 중요합니까?”. 나는 그만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밤새도록 고민했다. 도리어 이 길이 교총을 위한 방도일 수도 있다는 판단이 서기도 했다. 새벽 일찍 교총으로 출근해 회장직무대리를 지명하고 회장직 사퇴서를 써놓고 나왔다. 청와대를 향해 급하게 차를 몰았다.


※ ‘살며 생각하며’는 대한민국 저명인사의 인생 스토리와 철학, 경험담을 소개하는 코너입니다. 이번 ‘살며 생각하며’에는 윤형섭 전 교육부 장관(전 교총 회장)이 함께 합니다.

■윤형섭 전 교육부 장관은...
연세대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했다. 연세대와 미국 존스 홉킨스대에서 정치학 석사학위, 연세대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연세대 교수로 재직하면서 학생처장, 사회과학대학장, 행정대학원장 등 주요 보직을 맡았다. 한국정치학회 회장, 한국교원단체총연합회 회장, 건국대 총장, 호남대 총장, 교육부 장관 등을 역임했다. 연세대 명예교수다.

<한국대학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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