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형섭 전 교육부 장관(전 교총 회장)

최근 새삼스럽게 장관 임명장을 꺼내 봤다. 거의 30년만이다. 내용은 불과 열다섯 글자밖에 없다. “국무위원에 임함. 교육부장관에 보함.” 이게 전부다. 1990년 12월 27일 나는 취임식을 마치자마자 소속했던 Y대학교에 교수직 사퇴서를 냈다. 교육부 장관 평균수명이 불과 7개월이라는데 정년까지 무려 8년이나 남아있는 교수직을 내가 원치도 않았던 직책 때문에 사퇴해야 하다니! 그리고 지난 37년간 그토록 열정적으로 내 젊음을 불살랐던 캠퍼스를 끝내 떠나야 하다니! 그러나 어찌하랴. 청와대 N 씨의 말대로 대한민국이 더 크고 더 중요한 것을! 그러나 P 총장은 나의 사퇴서 수리를 거부했다. 대학의 관행대로 휴직원으로 바꿔내라는 것이었다.

그 일로 며칠간 옥신각신하는 사이에 내 임기 중 최초의 결재서류가 감사관실에서 먼저 올라왔다. Y대학 총장 및 주요 보직교수들에 대한 일괄 징계품의서였다. 나는 지극히 당황스러웠다. 품의 내용을 보니 A안과 B안 중에서 장관이 택일하라는 것이었는데, A안은 총장해임으로 시작되는 가혹처벌안이었고 B안은 총장경고로 시작되는 관용처분안이었다. 사연을 살펴보니 대학측이 입시전형에서 지난 수십 년간의 관행을 잘못 반복한 측면이 있었다. 나의 판단으로는 B안이 옳았다. 그러나 B안 선택이 정당성을 확보하려면 내가 일차적으로 그 대학과의 인연을 시급히 단절해야겠다는 판단이 섰다. K 비서관을 P 총장실에 보내 내 사표가 수리되기 전에는 돌아오지 말라 일렀다. 사표가 수리되고 나서야 B안에 결재했다. 다행히도 뒷말은 없었다.
 
내가 그러한 결벽증과 고집스런 열정을 지니고 1년 1개월을 동분서주하고 고투하던 어느 날 경기도 부천에 있는 서울신학교에서 대학입학학력고사 시험문제지를 도난당했다. 나는 그 책임을 지고 장관직에서 물러났다. Y대학에는 휴직원이 아니라 사퇴서를 제출했기 때문에 자동복직이 될 수 없어 평생 처음으로 몇 개월이나마 조용하고 한심한 무직자가 돼버렸다.

그러나 눈을 감고 삶을 되돌아보는 절호의 기회였다. 1957년부터 육군사관학교 교수부 사회과학과와 1963년부터 Y대학 정외과 그리고 1992년 교육부 퇴직까지의 긴 세월을 통해서 내가 한결같이 그리고 고집스럽게 주장해 온 한 가지 주제가 있었다. “교육의 정치적 독립”이 바로 그것이었다. 내가 교수직 사퇴를 고집했던 것도 나의 보직이 하필이면 교육부의 수장이었기 때문이었다.

코로나19 팬데믹을 방지하고 국민건강을 담보하기 위해서는 ‘사회적 거리두기’가 필수과제이듯이 우리의 정치·사회적 부패를 예방하고 이 나라의 민주주의와 정치문화의 선진화를 위해서는 교육의 ‘정치적 거리두기’가 뭣보다 절실하다는 것이 나의 오랜 신조였다. 

나는 평생토록 대학에서 비교정치론과 한국정치론을 강의했다. 그러나 한국 정치의 현장을 주관적으로 해석하고 비판하면서 이를 학생들의 뇌리에 주입시키는 위험을 극도로 피하도록 노력해왔다. 교육이 정치가 되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었다. 나의 저서 한국정치론(박영사, 1988)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다만 비교정치학적 접근법을 활용해 한국정치를 객관적으로 분석하되 이에 대한 현실적 판단과 선택은 학생들의 몫으로 보장해줘야 한다고 주장해 왔던 나다. 그 대신 나의 개인적인 정치적 의견을 월간 사상계를 비롯해 TV, 신문, 잡지 등의 대중매체를 통해서 교실 밖에서 발표했다. 교육은 결코 정치선전이 될 수 없다. 교육은 학생에게 필요한 지식과 정보를 제공하고 올바른 판단력을 육성하는 것이 목적이지만 선전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학생을 추종자로 만들고자 할 뿐이다.

마찬가지로 정치도 교육에 대해서 불가침의 원칙을 존중해야 하며 스스로 교육과 일정 거리를 유지토록 노력해야 마땅하다는 것이 나의 주장이었다. 나는 “교육의 정치적 독립”을 주장하면서 교수 시절은 물론이고 교련과 교총 회장을 거치면서 오늘에 이르기까지 몸소 실천코자 최선을 다해왔다. 심지어는 입법·사법·행정에 교육을 포함해 4권분립 개헌을 주창하기도 했다. 

이 원칙을 현실 속에서 지켜내기 위해 내 딴에는 참으로 눈물겨운 역정을 겪었다. 육사 교관시절 교장(L 삼성장군)의 정치 편향적 훈화를 비판하다가 군법회의에 회부될 뻔했던 것도 그 때문이었고 전두환 신군부 집권시절 Y대학 교무위원회에서 대학의 존엄을 유린하는 정부의 지시를 비관하는 발언을 했다가 학장직을 박탈당하고 외국으로 추방된 것도 그 때문이었다. 장관시절 집권당 대표와 C 의원이 자신들의 정치적 이익을 위해 K대학으로 하여금 C 의원의 지역구에 대학을 설립토록 억압한 것을 내가 뒤늦게 장관으로 취임해 이를 분쇄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서울신학교의 시험지 도난사건을 핑계로 집권당 대표가 나를 장관직에서 해임토록 청와대에 압력을 가한 것도 따지고 보면 교육의 정치로부터의 독립을 주창하는 나의 집념이 자초한 결과였다. (이에 대해서는 동아일보 1998. 3. 18.일자에 “김영삼 정권 5년의 공과, 괘씸죄 걸리면 옷 벗어”란 제목의 전면 기사가 잘 말해주고 있다.)

장관재임 중 두 차례(1991.1.1.과 1992.1.1.), 국무위원들의 국립묘지(동작) 합동 참배가 있었다. 나도 성심을 다해 참배했다. 그 직후 모든 국무위원이 총리를 앞세우고 집권당의 단배식을 향해 출발했다. 나는 그때마다 이를 거부하고 아웅산 희생자 묘지로 향했다. 나는 평생을 통해서 당에 발을 들여놓은 일이 단 한 번도 없다. 나의 평생의 친우가 당의 총재가 됐어도 마찬가지였다. 장관 퇴임 후에는 누구나 집권당의 국책위원이 된다. 나는 교육부장관 출신임을 이유로 내세워 이에 동참할 수 없다고 선언했다.

교육의 정치적 독립! 이 원칙이 나의 공직자로서의 모든 판단과 행동을 좌우했다. 정치는 주로 현실적 가치의 쟁취를 위해서 투쟁하지만 교육은 오직 미래의 가치창조와 계승을 위해서 존재한다. 그러므로 교육은 정치의 존재 양식이나 현실적 이해관계에 좌우돼서는 안된다.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정치권력형 변이바이러스가 교육 영역에 침투해 교육을 정치적으로 고열화할 것이며 교육 본래의 건강한 사명 수행을 저해할 것이 분명하다. 

 

※ ‘살며 생각하며’는 대한민국 저명인사의 인생 스토리와 철학, 경험담을 소개하는 코너입니다. 이번 ‘살며 생각하며’에는 윤형섭 전 교육부 장관(전 교총 회장)이 함께 합니다.

■윤형섭 전 교육부 장관은...
연세대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했다. 연세대와 미국 존스 홉킨스대에서 정치학 석사학위, 연세대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연세대 교수로 재직하면서 학생처장, 사회과학대학장, 행정대학원장 등 주요 보직을 맡았다. 한국정치학회 회장, 한국교원단체총연합회 회장, 건국대 총장, 호남대 총장, 교육부 장관 등을 역임했다. 연세대 명예교수다.

<한국대학신문>

저작권자 © 한국대학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