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형섭 전 교육부 장관(전 교총 회장)

1991년의 정기국회, 그날도 본회의장 국무위원석에 앉아 긴장과 피곤의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바로 그 때 국회 직원이 메모지를 갖고 왔다. “윤 장관님, 본회의 끝나거든 바로 김영삼 당 대표실로 와 주시기 바랍니다. -원내총무 김종호.” YS가 왜 갑자기 나를 부를까? 혹시 조금전에 있었던 야당(평화민주당) L 의원의 교육 관련 질의에 대한 나의 답변이 너무 친야적이었나? 

본회의가 끝나자마자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당 대표실로 향했다. 들어서는 순간, 앗차 했다. YS, 원내총무, C 의원이 이미 와 있었다. C 의원을 보는 순간 나의 예상이 빗나갔음을 직감했다.

YS가 입을 열었다. “윤 장관, K대학의 속초-고성 분교(동제 대학) 설립 건은 윤 장관 취임전에 이미 당정협의회에서 합의했던 사항이니 조속히 결재하시오.” 나는 내 귀를 의심했다. 
 
나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대표님, 이 문제는 좀 더 신중히 고려할 사항이 많으니 제게 맡겨주시죠” 했다.
 
그런데 YS가 “동해안 속초·고성 지역에 대학을 설립하는 일은 우리 집권여당의 선거 공약이었소” 하며 압박하는 바람에 나는 더 이상 물러설 수가 없다. “공약이요? 누구 공약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노태우 대통령의 교육 관련 선거공약은 교육부장관으로서 제가 철저히 챙기고 있습니다. 그 안에 그런 공약은 없습디다. 여기 앉아있는 C 의원 지역구 선거 공약인것 같은데 중앙정부가 어찌 전국에 걸친 지역구 입후보자들의 자의에 의한 공약까지 이행할 수 있겠습니까? 그 대학의 설립계획을 알아봤더니 대학 설립자금을 서울 광진구의 K대학 일부 부지를 매각해 조달한다고 합디다. 그러나 K대학의 내부사정을 조사해 봤더니 교수연구실과 강의실, 교직원 복지, 학생의 복지시설, 도서관 장서 등 자체 내 기준미달사항과 구성원들의 욕구불만 사항이 많습디다. 그런데 그 학교의 땅을 팔아서 엉뚱하게 동해안 C 의원 지역구에 대학을 설립한다면 그게 어찌 사회적 정당성을 인정받겠습니까? 만일 이 사실이 K대학에 알려진다면 현재 대학가의 기류로 보아 1986년의 극렬했던 폭력시위가 재현될 것이 불을 보듯 뻔합니다. 더욱이 K대학은 이미 충주에 분교를 설립·운영하고 있습니다. 그곳도 현재 시설투자와 운영면에서 재정적으로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는데 동해안에 제3의 캠퍼스 설립을 승인하라구요? C 의원의 입장은 충분히 이해합니다만 더욱 신중하게 접근해야 할 것 같습니다.” YS는 벌떡 일어나 밖으로 나가버렸다.

YS 최측근의 말에 의하면 그날부터 내 이름이 YS의 살생부에 올랐다고 한다. 그리고 C 의원은 나의 고등학교 동기동창이건만 그날이 나와의 마지막 만남이 되고 말았다. 동아일보는 후일의 기획기사(1998.3.18.)에서 YS에 대한 내 죄목을 ‘괘씸죄’라 명명했다.

그로부터 몇 개월 후, 교육부가 주관하는 후기 대학 입학학력고사 시험문제지를 시험전야 경기도 부천 서울신학교에서 도난당하는 사고가 발생했다. 나는 사태수습과 함께 사후 대책을 발표한 뒤 서둘러 장관직 사표를 냈다. 

사표가 수리된 후의 어느 날, 노태우 대통령의 점심 초대가 있었다. 대통령의 말씀이다. “윤 장관 미안합니다. 내 마음이 아픕니다. 윤 장관은 야밤에 시험지를 도난당한 피해자 아닙니까? 그러므로 그 사태의 책임은 경비와 치안을 책임진 내무부와 경찰에게 있다는 여론도 나는 잘 압니다. 그러나 YS가 이번에 윤 장관을 해임시키지 않으면 자기로서는 눈앞에 다가온 14대 총선을 책임지지 못하겠다고 하니 어쩌겠습니까? 윤 장관이 이해하고 잠시 쉬고 계세요” 하는 것이었다. 나는 “심려를 끼쳐 죄송합니다. 이렇게 쉴 수 있게 해주셔서 도리어 감사할 뿐입니다” 하고 물러났다. 그 후 얼마 안 돼 서울신문사 사장으로 발령이 났다. 직원이 무려 1600명, 전국 최대의 신문사란 사실에 나는 아연실색했다. 

나는 신문사 운영체제의 혁신작업과 장기 발전계획에 착수했다. 불과 몇 개월 만에 적자를 흑자로 바꿨다. 때마침 14대 대선의 열풍이 몰아치면서 YS와 DJ의 격돌이 불을 뿜었다. 나는 공영언론으로서 엄정한 정치적 중립을 지킬 것을 사시로 내세웠다. DJ와 YS측의 비난에도 그 원칙으로 대응했다.

그러나 YS 캠프는 당선되자마자 서울신문 임원진의 개편에 손을 댔다. 나 한 사람만 남겨놓고 임원 전원 교체 방침이라는 통보가 왔다. 그러나 주주총회 전날 저녁에 또다시 급하게 통보가 왔다. YS의 지시로 이번 임원교체에 윤 사장도 포함하기로 됐다는 것이다. 나는 도리어 고맙다는 답신을 보내고 그 다음 날 아침 주주총회를 희희낙락 웃음 속에서 마쳤다. YS는 K대학 사건으로 인한 괘씸죄를 물어 내게 두 번째 보복을 가한 셈이다.

그러나 나는 도리어 감사한 마음을 지울 수 없다. YS의 나에 대한 해임으로 나는 실로 오랜만에 자유의 몸이 돼 몇 년간 별렀던대로 급히 모 종합병원에 입원해 최단시간 내에 위험천만한 하마토마(Hamartoma) 대수술을 아슬아슬하게 마쳤다. 그 후 건강을 회복하고 건국대(1994) 총장과 DJ의 반부패특별위원회위원장(1999) 및 호남대(2001) 총장을 거치면서 오늘에 이르렀다. 특히 1992년 1월 교육부 장관 사퇴 후에는 그 덕에 1988년에 발행했던 두 권의 책, 한국정치론(박영사)과 정치와 교육(박영사)의 증보판을 낼 수 있었다. 이 또한 YS의 은덕이었다.

지금에 와서 다시 생각해도 나를 이처럼 두 번씩이나 격무에서 해방시켜줘 위태로웠던 생명을 건져낼 수 있게 해주고 저술 활동의 추가적인 성과를 낼 수 있게 해준 YS, 그가 내게 그처럼 두 번씩이나 ‘괘씸죄’를 적용한 것이 내게는 도리어 크나큰 은덕이 됐으니 어찌 감사해야 할지 모르겠다. 이게 바로 인생의 묘리 아니겠는가. 

※ ‘살며 생각하며’는 대한민국 저명인사의 인생 스토리와 철학, 경험담을 소개하는 코너입니다. 이번 ‘살며 생각하며’에는 윤형섭 전 교육부 장관(전 교총 회장)이 함께 합니다.

■윤형섭 전 교육부 장관은...
연세대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했다. 연세대와 미국 존스 홉킨스대에서 정치학 석사학위, 연세대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연세대 교수로 재직하면서 학생처장, 사회과학대학장, 행정대학원장 등 주요 보직을 맡았다. 한국정치학회 회장, 한국교원단체총연합회 회장, 건국대 총장, 호남대 총장, 교육부 장관 등을 역임했다. 현재는 연세대 명예교수와 학교법인 홍신학원 이사장을 맡고 있다.

<한국대학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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