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형섭 전 교육부 장관(전 교총 회장)

“윤 위원장님, 혹시 대통령님과 무슨 특별한 관계가 있으신가요?” 1999년 9월 10일 김대중 대통령으로부터 대통령 직속 반부패특별위원장 위촉장을 받던 날. 청와대 비서실장 K씨가 던진 첫 질문이다. “아니요, 천만의 말씀입니다. 그럴만한 관계가 전혀 없습니다. 왜 그러시죠?” 내가 되물었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자기들 쪽(당과 청와대를 포함한 듯했다)에서 위원장 후보자를 추리고 또 추려 최종 후보로 세 분을 올렸는데 두 분은 DJ와 인맥과 연분이 있는 당쪽 인사였고 나머지 하나가 나였는데 그중에서 최종적으로 내가 대통령의 낙점을 받았다는 것이었다. DJ가 아무리 포용력이 크고 담력이 대단한 위인이었다 하더라도 어찌 그 조심스럽고 막강한 자리에 정적이라 할 노태우 정권의 교육부장관 출신을 선택할 수 있단 말인가. 이점에 경악과 감동이 겹치는 모양이었다.

나의 지나온 삶을 아무리 살펴봐도 나는 DJ와는 혈연, 지연, 학연을 포함해서 그 어떤 연분도 정치적 인맥도 없다. 내가 비록 정치학자이긴 해도 평생을 교육자로 살아온지라 현실정치와는 언제나 거리를 두었기 때문에 DJ의 목숨을 건 정치행보에도 아무런 도움이 된 바가 없다.

도리어 DJ도 YS처럼 내게 괘씸죄를 덮어씌울 이유는 몇 가지 갖고 있었다. 첫째, 서울신문사장 시절(1992~1993)이다. 어느 날 이른 아침에 누군가가 집으로 전화를 걸어왔다. 받고 보니 DJ였다. “엄정중립을 외치던 윤 사장이 이렇게 편향된 기사를 내보낼 수 있느냐?” 하는 엄중한 항의 전화였다. “절대로 그런 일 없습니다”라고 항변했다. 그랬는데도 오전중에 최측근인 P씨를 사장실로 보내왔다. 그에게도 나는 서울신문이 지향하고 있는 중립성과 언론의 정치적 독립성을 주장했다. 알고보니 그날의 1면 박스기사에 YS관련 기사가 DJ관련 기사보다 더 크게 다뤄졌다는 점이 문제가 됐던 것이다. 그러나 기사의 편향성 여부는 단순히 기사의 크기보다 기사 내용의 질과 지향점을 보고 판단해야 한다는 것이 나의 반론 요지였다. 

두 번째는 한국 교총회장(1990)때 였다. “교원의 지위 향상을 위한 특별법” 제정을 촉구하기 위해서 동분서주하던 때였다. 전교협(전국교직원협의회)이 전교조(전국교직원노동조합)로 변신한 이후인지라 정치환경에 예민한 정치권은 여야 할 것 없이 교총의 교원지위향상법안을 2년(1988~1990)씩이나 국회에 계류시킨채 방치하고 있던 때였다. 그러니 정치권의 지도자들을 상대로 하는 나의 설득 작전도 더욱 강성화될 수밖에 없었다. “정치권은 교사와 교육을 정치적으로 이용하지 말라. 그럴수록 국운은 쇠퇴한다. 교육의 정치적독립을 제도화하라. 그러기 위해서도 교원지위향상법을 조속히 통과시켜라” 하는 점 등이 내 주장의 요지였다. 그 과정에서 정서적으로 내가 틀림없이 야권 지도자의 심기를 불편케 했던 것 같다.

특히 비슷한 시기에 서울 잠실체육관에서 전국 학교분회장 및 교원대표자 대회를 열었다. 전국의 교원대표 1만 3000명이 운집했다. 모든 언론도 이를 유사 이래 처음이라며 대서특필했다. 나는 DJ와 YS를 연설자로 초빙했다. 나는 대회장으로서 개회 연설을 했다. 다음날 아침에보니 C 주요일간지(1990.5.23.) 사설에 나의 연설내용만이 그대로 반영됐다. 나도 놀랐다. 그 사설의 제목은 “3불 교사상의 확립”이었다. 나는 그날의 연설에서 교사는 정치꾼이 아님을 역설하면서 교사는 결코 장사꾼도 막일꾼도 아니니 정치적으로 이용하지 말라고 외쳤다. 정치인들을 면전에서 난처케 했으니 그 또한 결례였다 하겠다.

세 번째는 나의 교육부장관시절(1990~1992)이다. 국회 본회의가 있던 어느날 야당(평화민주당)쪽에서 면담 요청이 있었다. 단숨에 달려갔다. DJ를 중심으로 당의 간부급 의원들이 양쪽으로 줄지어 앉아있었다. DJ가 입을 열었다. 전남 모 지역의 교육시설 관련 민원이었다. 나는 정중하게 난색을 표명했다. 상세한 이유를 덧붙이기는 했지만 이것 또한 당무위원들 앞에서 DJ의 권위에 대한 불경죄 구성요건이었으리라 본다. 

그뿐만 아니다. 비슷한 시기에 대학 기부금입학제 논의가 일부 교육계 특히 사립대학과 시민사회에서 찬반양론으로 갈려 활발하게 일고 있었다. 당시 DJ의 평민당 의원들은 일제히 공정사회의 마지막 보루인 대학마저 돈으로 학생들을 뽑겠다는 거냐며 비분강개했다. 그러나 나는 모 일간지와의 인터뷰에서 “기부금입학제가 아니라 대학발전 기여입학제로 개념을 광범위하게 바꾸고 일정수를 정원외로 입학을 허용함으로서 다른 입시 경쟁자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고 성적도 과별 커트라인에서 동점내지 일정 점수 이내로 제한하는 등의 세부 조건을 붙이면 부의 재분배와 사학의 발전전략이라는 차원에서 사회정의상 긍정적인 평가를 해줄 여지도 있을 수 있으므로 좀 더 개방적이고 심도 있는 사회적 논의가 허용되어야 할 시기가 도래했다고 본다”며 나의 입장을 완곡하게 밝혔다. 그러나 그 당시로서는 나 자신을 DJ그룹의 정치적 저격의 표적이 되기를 자청한 것이나 다름없는 행위였다. 

그처럼 DJ의 심기를 거스린 사안이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나를 반부패특별위원장으로 선택·위촉했으니 K 비서실장보다도 내가 더 놀랄 일 아니겠는가. 

돌이켜 보니 예비적인 신호였다고 판단할만한 사건이 일찌감치 있기는 했다. 모 기관에서 내 아우(모 사립고교 교장)와 아들(모 금융신탁회사 근무)의 직장에 와서 각각의 재정 관련 뒷조사를 철저히 하고 갔다는 것이었다.

그러니 내 뒷조사인들 어찌 안 했겠는가. 아내는 내가 여러가지의 고위공직을 거쳐왔으므로 누군가의 모함을 받고 있는 것으로 믿고 불안해했으나 나는 절대적인 자신감을 갖고 아내를 안심시켰다. 

그러므로 내가 DJ로부터 받은 위촉장은 도리어 대한민국 정부가 내게 준 “대한민국 청렴 공직자 확인증”이나 다름없다고 믿고 가족들에게 자부심의 근거로 삼으라고도 했다. 오늘까지도 나는 그 일을 자랑거리로 여기고 있으나 DJ가 어째서 그 자리에 나를 택했는지 만22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도 나는 그 이유를 모르고 있다.


※ ‘살며 생각하며’는 대한민국 저명인사의 인생 스토리와 철학, 경험담을 소개하는 코너입니다. 이번 ‘살며 생각하며’에는 윤형섭 전 교육부 장관(전 교총 회장)이 함께 합니다.

■윤형섭 전 교육부 장관은...
연세대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했다. 연세대와 미국 존스 홉킨스대에서 정치학 석사학위, 연세대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연세대 교수로 재직하면서 학생처장, 사회과학대학장, 행정대학원장 등 주요 보직을 맡았다. 한국정치학회 회장, 한국교원단체총연합회 회장, 건국대 총장, 호남대 총장, 교육부 장관 등을 역임했다. 연세대 명예교수다.

<한국대학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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