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형섭 전 교육부 장관(전 교총 회장)

1981년 초겨울, 전두환 12대 대통령이 이끄는 제5공화국의 첫해이다. Y대학의 이만섭 이사(후일 대한민국 국회의장)로부터 전화가 왔다. 급하고 심각하나 조용한 음성이었다. “윤형, 지금 이사회 도중에 나와서 전화하는 거요. 총장이 학사보고에 앞서서 말하기를 관계 당국에서 윤형섭 사회과학대학장을 즉각 해임시키든지 못하겠거든 총장이 사퇴하라 했다는데 그게 무슨 소리요?”

나는 내가 학생처장시절(1975.1~1979.2)부터 정권의 비협조교수 즉 기피인물이었다는 것은 익히 알고 있었고 심지어 학생처장실에서 모든 교직원이 보는 가운데 안기부(지금의 국가정보원) 요원에게 연행당한 일도 있었지만 전두환 정권 들어서자마자 이처럼 아무런 법적 절차도 없이 사학의 최고위급 인사 조치를 겁박하는 것은 나로서는 생전 처음 겪는 불법 처사요 상식 밖의 일이었다. “이형, 오늘의 이사회에서는 그 문제를 더 이상 논의하지 않도록 해주시오. 까딱하면 다른 희생자가 또 생겨 납니다. 내가 내일중에 말끔하게 해결해 놓겠습니다.”

나의 처신 여하에 따라 학교와 총장과 다른 동료 학장들이 피해를 입을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99.9%의 투표율에 90.2%의 득표율을 과시하는 전두환 정권의 위세가 그만큼 험악하고 살벌했기 때문이다. 정통성의 위기(Legitimacy Crisis)는 이미 그의 바로 앞에 다가와 있었다. 권력의 정통성이란 권력 형성과정이나 행사 과정에서 정치적·사회적·윤리적 정당성을 상실하면 필연적으로 붕괴토록 돼 있기 때문이다.

이 이사와의 약속대로 나는 다음날 아침 총장실 문을 두드렸다. 불문곡직하고 학장직 사퇴서를 제출했다. 외형상으로는 내가 자의로 사퇴한 것으로 돼 있으나 실질적으로는 학장직을 박탈당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총장은 놀라고 당황하는 표정이었으나 마음속으로는 고맙고 미안해하는 것 같았다. 복도까지 나와서 나를 전송했다. 그만큼 그는 순박하고 선량한 분이었다.

문제의 발단은 대학의 최고 의사결정기구인 교무위원회에서의 나의 발언에 있었다. 나는 지금도 교수로서 특히 교무위원으로서 당연한 발언이었다고 믿고 있다.

교무위원회가 열리면 관행에 따라 대학 본부의 실·처장들의 보고 순서가 있다. 그런데 경우에 따라서는 보고 내용이 곧 상부 지시의 의미로 둔갑할 때도 있다. 그러므로 보고사항을 청취했다는 것만으로 귀책 사유가 발생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날의 교무처장의 보고 내용이 그런 경우에 해당된다. 그 내용이 나의 평상심과 학장으로서의 책임감 그리고 교수로서의 자존심에 폭발적인 불을 지폈다. 그 보고 내용이란 이런 것이었다. 

“학생들이 집체군사 훈련을 받기 위해서 문무대(성남 소재 학도군사훈련소)로 학과출장할 때 모든 버스에 교수들이 한 사람씩 동승해 현장까지 인솔하라”는 것이었다. 참으로 아연실색할 노릇이었다. 문교부(지금의 교육부) 장관이 사립대학 교수들에게 어찌 감히 그런 가당치도 않은 지시를 내릴 수 있단 말인가? 내 귀를 의심할 정도였다. 한동안 무겁고 어두운 침묵이 회의장을 덮었다. 결국 내가 사회과학대학장으로서 십자가를 질 수밖에 없었다. 나는 무겁게 입을 열었다.

“이 보고는 접수할 수 없습니다. 학생들이 문무대 학과출장을 하기 위해서는 사전에 학교 운동장에 모여 학도군사훈련단의 군장검열과 이동시의 주의사항을 듣고 출발케 되어있는데 마땅히 그들 학군단 장병들이 직접 인솔하는 것이 옳은 겁니다. 학과출장 자체가 군사교육의 일환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요지의 내 발언에 대해서 교무위원 거의 모두가 고개를 끄덕거렸으나 찬성 발언은 아무도 못했다. 그만큼 엄혹한 시대였다. 결국 15명의 학장들만 총장실에 따로 모여 이 문제를 재론했다. 이 자리에서는 학장들이 만장일치로 내 발언을 지지했다. 교수들을 동원하지 않기로 의결됐다. 총장 주재하의 학장 회의였기 때문에 관계 당국에서 총장인책론을 들고 나왔던 것은 그 때문이었다.

학장직을 내려놓고는 강의만하고 집에와서 은둔중이던 어느날, 문교부 K 실장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요지는 “1주일 내에 이 나라를 떠나라”는 것이었다. 내가 마치 아돌프 히틀러의 전체주의 독재체제하에 살고 있는 심정이었다. K 실장의 사유 설명에 따르면 이틀 전부터 우리 학교 총학생회 간부들이 리더십 트레이닝이란 명목으로 설악산 모처에서 합숙중인데 상경후의 첫 대정부 투쟁목표가 “윤형섭 사회과학대학장의 사퇴 경위를 밝혀라!”로 결정됐다는 것이다. 윤 학장이 진정 학교를 사랑한다면 학생들 눈앞에 나타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이 나라를 떠나라”는 것이었다. 나는 K 실장의 만류를 뿌리치고 장관실로 직행, 문을 두드렸다. L 장관에게 선 채로 소신을 밝혔다. “내가 교무위원회에서 한 발언을 가슴속에 소중히 간직하고 다시는 학생 군사훈련 버스에 우리 민간 교수들이 동승·인솔하는 일이 없도록 해주시오. 그런 군국주의적·후진적 정책이 재현되지 않도록 장관께서 책임지고 막아주시오. 나는 수일내로 이 나라를 떠날 테니 안심하시오” 그러나 그는 묵묵부답이었다.

나는 나에 대한 그 당시의 정권 차원의 박해가 L 장관의 의지가 아니었음을 확인했을 뿐만 아니라 전두환 당시 대통령의 의사와도 무관했음을 알게 됐다. 보고조차도 안 됐던것 같다. 그러므로 안기부(지금의 국정원)의 중간 이하 조직원들과 동급 관계기관원들의 과잉 충성 그리고 70년대 나의 학생처장 시절 맺혔던 나에 대한 기관원들의 원한이 빚어낸 넌센스였다고 보는 것이 당시의 입장이었다.

게이오대학에서 Y대학 총장의 배려와 노고에 힘입어 내가 방문 교수의 예우를 받았던 한 학기가 끝날 무렵 Y대 사회과학대학 교학부장 S 교수의 서한이 날아들었다. “정부가 드디어 학장님의 주장을 받아들여 정책을 바꿨고 이제는 귀국해도 된답니다”라는 내용이었다. 나는 그런 과정을 거쳐 반민주적인 군부 독재의 횡포를 몸으로 겪었다. 학교로 무사히 돌아오니 더 이상 행복할 수가 없었다.

※ ‘살며 생각하며’는 대한민국 저명인사의 인생 스토리와 철학, 경험담을 소개하는 코너입니다. 이번 ‘살며 생각하며’에는 윤형섭 전 교육부 장관(전 교총 회장)이 함께 합니다.

■윤형섭 전 교육부 장관은...
연세대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했다. 연세대와 미국 존스 홉킨스대에서 정치학 석사학위, 연세대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연세대 교수로 재직하면서 학생처장, 사회과학대학장, 행정대학원장 등 주요 보직을 맡았다. 한국정치학회 회장, 한국교원단체총연합회 회장, 건국대 총장, 호남대 총장, 교육부 장관 등을 역임했다. 현재는 연세대 명예교수이다.

<한국대학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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