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형섭 전 교육부 장관(전 교총 회장)

지극히 최근의 일이다. 금년 들어 가장 추웠던 날이라서 그랬는지 지하철 3호선에 빈자리가 많았다. 안국역 출구 엘리베이터 앞에도 오직 한 분의 노신사가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그에게 먼저 타시도록 권했다. 그러나 그는 “아니요, 어르신께서 먼저……” 하면서 순서를 양보하더니 “일찍이 어르신들께서 고생하면서 우리나라를 이렇게까지 만들어 놓으셨는데……” 하면서 인사를 이어나갔다. 그 순간 내 가슴은 울컥했다. 나는 당황한 나머지 “아니요, 저는 아무것도 한 게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 앞세대 어른들께서 집중적으로 희생됐고 이 나라 발전에 기여한 것은 사실이지요” 하면서 인사동 입구까지 걸어 나왔다. 그날의 영하 11° 혹한을 녹이는 훈훈하고 감동적인 대화였다. 

동시에 수년 전에 어떤 TV 채널에서 본 한 정치인의 대중연설 장면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그는 “이게 나라입니까? 세상에 이런 나라가 어디 있습니까? 나라가 나라다워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는 흥분한 얼굴과 격앙된 어조로 열변을 토했다. 대중의 환호와 박수가 터져 나왔다. 나는 바로 여기에서 정치지도자와 정치선동가의 궤가 다름을 목격했다. 앞에서 말한 안국역의 노신사와 여기서 말하는 정치인의 국가관과 역사관이 확연히 대조적이었다. 조상과 조국을 모욕하는 오만불손한 정치선동가가 대중의 지지를 받는다면 자칫 포퓰리스트 1인 체재(monocracy)가 되거나 아니면 그의 측근 세력들의 이해관계에 의해서 국가가 좌우되는 패거리체제(oligarchy)가 되고 말 것이다. 우민 또는 폭민정치(mobocracy)나 금권정치(plutocracy)의 위험성도 배제할 수 없다. 민주정치(democracy)는 그것들과 담 하나 사이의 지근 거리에 있기 때문에 위협을 받을 수밖에 없다.

오늘날엔 불행하게도 하나의 혈연으로 맺어진 우리 민족공동체 안에 두 개의 국가공동체가 병존해 서로 위기감을 조성하며 적대관계를 유지하고 있으나 어떠한 형태의 공동체이든 이를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구성원들이 자신의 소속공동체를 사랑해야 한다. 그러한 입장에서 자국의 과거사를 긍정적으로 그리고 애국적으로 수용해야 한다. 특히 구성원의 하나같은 동질성, 소속성, 결속성이 높아져야 하며 국가발전에의 참여와 기여의 의무감이 원숙해져야 한다. 또한 국민 모두는 희로애락을 공유하는 공생·공멸의 공동운명체라는 의식이 국가와 시민사회에 의해서 교육돼야 한다. 이 점에서 국민을 자괴와 절망과 수모의 도가니로 몰아넣는 선동형 이기적 정치인보다는 안국역의 노신사가 도리어 우리의 앞날을 밝혀준다. 

공동체 발전을 위해서 반드시 덧붙일 것이 있다. “다워야 주의”이다. 대한민국이라고 하는 최고 수준의 지연공동체가 진실로 나라다운 나라가 되려면 모든 지체들 즉 모든 구조와 기능이 각각 제자리에서 제 몫을 충실히 감당해 줘야 한다. 대통령이 국회의장이나 대법원장처럼 생각하고 행동해서는 안된다. 수석비서관이 장관다워서도 안 되며 청와대 비서실장이 국무총리 다워서도 안된다. 이익통합 구조인 정당이 이익표출구조인 압력 단체 구실을 해서도 안된다. 법원은 오직 헌법적 가치를 보호하고 정의를 구현하는 최후 보루다워야 한다. 공무원이 기업체의 임원이나 국회의원 흉내를 내서는 국가공동체가 올바로 살아남을 수 없다. 교수는 교육자다워야 하고 학생은 피교육자다워야 한다. 그래서 각자의 역할을 존중해야 한다.

1959년의 늦가을 어느 날 나는 지금의 대학원 총학생회장인 Y대 대학원 원우회장으로서 대학원장과 단독 면담을 했다. 대학원 졸업요건에 관한 대학원 정책을 반대하기 위함이었다. 장시간의 토론이 이어졌다. 그날의 마지막 순간, 대학원장의 단도직입적인 한 말씀이 나를 강타했다. “윤군, 대학원의 학사를 운영함에 있어 대학원장의 의견과 학생회장의 의견이 끝내 이렇게 불일치할 경우에는 누구 의견이 존중되어야 하겠나?” 그 한 말씀에 나는 “원장님 말씀이 옳습니다. 제가 잘못했습니다. 돌아가서 학생들을 잘 설득하겠습니다” 하고 물러나와 전교 대학원 참사회의를 소집하고 사후 정리를 마친 일이 있다. 후에 알고보니 그때가 그 어른, 김윤경 교수의 정년퇴임 직전이었다. 고개가 절로 숙여졌다. 이제 와서 생각하니 그것이 바로 공동체 이론의 실천적 사례로서 자랑스러운 추억이 되어 내 뇌리에 아직까지도 선명하게 남아있다. 

비록 2500년전의 일이지만 어느 날 제 나라의 경공이 정치에 대하여 물었을 때 공자님의 대답은 간단명료했다. 즉 “임금은 임금다워야 하고, 신하는 신하다워야 하며, 아비는 아비다워야 하고, 자식은 자식다워야 한다. 이것이 정치의 근본이니라.(孔子,論語,顔淵篇,君君臣臣父父子子)” 현대정치학의 구조·기능분화 이론과 다를 바가 없다. 그 밖에도 명(明)나라 여곤(呂坤 1536~1618)의 저서 신음어 존심편에서는 “손에는 손의 할 일이 있고, 발에는 발의 할 일이 있으며 이목구비에는 이목구비의 할 일이 따로 있느니라”라는 가르침이 있어 새삼 가슴에 와 닿는다. 바꿔말하면 국가를 포함한 모든 공동체는 내부적으로 구조를 분화하고 구조마다 기능의 전문화와 자율성을 보장해줘야 한다. 이것은 민주국가 발전의 기본조건이다. 

더욱 놀랍게도 2000여년전 바울(St. Paul)은 훨씬 더 유기체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눈이 손더러 내가 너를 쓸데없다 하거나 또한 머리가 발더러 내가 너를 쓸데없다 하지 못하리라. 이어서 “만일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고통을 받고 한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즐거워 하느니라.” 즉 구조의 분화와 역할의 분담만이 아니라 서로 다른 구조와 역할 상호간에 존중할 것을 강조하고 있다. 실로 국가공동체가 공동운명체임을 실감케 하는 이론이라 하겠다. 내가 공동체 발전의 다워야주의(Dawuoyaism)를 주장하는 것은 그래서 하는 말이다.

※ ‘살며 생각하며’는 대한민국 저명인사의 인생 스토리와 철학, 경험담을 소개하는 코너입니다. 이번 ‘살며 생각하며’에는 윤형섭 전 교육부 장관(전 교총 회장)이 함께 합니다.

■ 윤형섭 전 교육부 장관은...
연세대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했다. 연세대와 미국 존스 홉킨스대에서 정치학 석사학위, 연세대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연세대 교수로 재직하면서 학생처장, 사회과학대학장, 행정대학원장 등 주요 보직을 맡았다. 한국정치학회 회장, 한국교원단체총연합회 회장, 건국대 총장, 호남대 총장, 교육부 장관 등을 역임했다. 현재는 연세대 명예교수와 학교법인 홍신학원 이사장을 맡고 있다.

<한국대학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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