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형찬 서울예대 교수
몇 해 전 해외에서 환수된 우리 문화재가 전시된 적이 있다. 외국에 흩어져 있던 우리 문화재를 오랜 시간 노력한 끝에 20여 점이 공개된 것이다. 그중에 이정의 ‘죽하관폭도’가 들어있다.
이른 아침 한 선비가 대나무 우거진 숲 밑에 서서 절벽에서 힘차게 떨어지는 폭포를 감상하는 그림이다. 이정의 그림은 많지 않다. 안타깝게도 서른 살에 요절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환수한 죽하관폭도는 매우 소중한 작품이다. 게다가 당대 최고의 명필가인 표암 강세황까지 붓을 들어 일필휘지하며 그림에 합세했다.
이정의 대표작으로 ‘수향귀주도’와 ‘한강조주도’를 들 수 있다. 수향귀주도는 비구름과 안개가 자욱한 마을로 배를 타고 돌아오는 풍경을 그린 그림이다. 며칠 동안 폭우가 내렸다. 강은 범람할 정도로 불었다. 집 둘레에 있는 큰 나무도 비를 흠뻑 맞아 가지가 축 늘어졌다. 강물은 빠르게 흐른다. 나룻배 한 척이 떠 있다. 비가 더 내리기 전에 어서 마을로 돌아가야 한다. 도롱이를 걸친 사공이 노를 젓는다. 그 모습이 애처롭다. 한강조주도는 추운 날씨에 차가운 강에 배를 띄우고 낚시하는 선비를 그린 그림이다. 늦가을이다. 강물은 유유히 흐른다. 물이 차다. 저 멀리 강 건너에 마을이 보인다. 한 선비가 차가운 강에 배를 띄우고 낚싯줄을 물 속에 드리운다. 찬 바람은 계속 불어오고 날은 더욱 추워진다. 그래도 떠날 기색이 없다. 강가엔 오래된 고목 나무가 이를 지켜보고 있다. 죽하관폭도의 선비, 수향귀주도의 사공, 한강조주도의 선비 이 모든 그림에 자기 자신을 그려 넣었다. 그림 속 주인공이 되고 싶었던 것이다.
이정은 조선 중기의 화가다. 이정의 집안은 대대로 화원 집안이었다. 증조할아버지, 할아버지, 아버지 모두가 그림으로 이름을 떨쳤다. 선조들은 불화를 무척이나 잘 그렸다. 이정의 탄생과 관련해서 이런 이야기가 전해온다.
이정의 어머니가 하루는 꿈을 꾸었는데 나한이 나타났다. 나한은 “너희 집안은 삼대가 계속해서 불화를 수천 폭이나 그렸다. 그런 공덕으로 아들 하나를 내려주겠다”고 말했다. 꿈을 꾼 후에 바로 이정을 잉태했다. 이정은 이렇게 조상들의 공덕으로 이 세상에 태어났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아주 어렸을 때 부모를 여의고 작은아버지 밑에서 자랐다. 이정은 부모님의 얼굴을 벽에 그려 놓고 아침저녁으로 절하면서 울었다. 부모님이 무척이나 보고 싶었던 것이다. 이정은 다섯 살 때 부처와 스님을 그렸다. 열 살이 넘어서는 금강산으로 들어갔고, 열세 살에는 장안사의 벽화와 천왕을 그렸다. 이정은 당시 최고의 문장가인 최립에게 시를 배웠으며 ‘홍길동전’을 지은 허균과도 매우 친하게 지냈다.
이정에 대한 재밌는 일화가 전해진다. 한번은 권세 높은 정승에게 불려갔다. 이정이 그림을 잘 그린다는 소문을 듣고 그림을 부탁하려고 부른 것이다. 비단을 쌓아놓고 술을 대접하며 그림을 그리라고 했다. 원래 이정의 성격은 강직해서 의롭지 않은 것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정승은 탐욕이 많고 행실이 깨끗하지 못한 탐관오리였다.
이정은 그런 사실을 알고 있었다. 탐관오리에 대한 적개심 때문에 그림을 그리고 싶은 마음이 전혀 생기지 않았다. 그래서 술을 거나하게 마시고는 비단 위에 엎드려 잤다. 한참 후에 일어나 붓을 잡고 그림을 그렸다. 뇌물을 가득 실은 소 두 마리를 두 사람이 몰고 솟을대문으로 들어가는 그림이었다. 정승은 그림을 보고는 버럭 화를 냈다. 그림의 의미를 알았기 때문이었다. 정승이 이정을 붙잡아 죽이려 하자 급히 도망쳐 평양으로 갔다. 그곳 평양은 풍광이 무척이나 아름다운 곳이었다. 그 아름다움에 반해 그곳에서 살았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서른 살 나이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허균은 이정을 그리워하며 ‘이정 애사’를 지었다. 벗을 잃은 애타는 슬픔과 사무치는 그리움이 문장 곳곳에 배어 있다. 눈물로 시작해서 눈물로 끝나는 그 야말로 애사이다.
<한국대학신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