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형찬 서울예대 교수
<홍길동전>을 지은 허균은 이징(李澄)을 ‘조선 제일의 화가’라 했다. 조선 사대부들 역시 이징을 국공(國工), 국수(國手)라 불렀다. ‘나라에서 으뜸’이라는 뜻이다. 이징은 어려서부터 화벽이 있었다. ‘벽(癖)’이란 무엇을 지나치게 즐기는 병 또는 고치기 어려울 정도로 굳어진 버릇을 뜻한다.
이징이 얼마나 그림에 집착했는지 전해오는 일화가 있다. 어렸을 때 다락에서 그림을 그렸는데 그림에 열중하느라 시간이 가는 줄 몰랐다. 그리해 사흘이 지났다. 집안에서는 아이가 사라졌다고 난리가 났다. 사흘 동안 집안 곳곳은 물론 온 동네를 다 찾아다녔다. 그래도 아이를 찾을 수가 없었다. 이제는 아이를 잃어버렸다고 포기했을 때 이징이 다락문을 열고 나왔다. 가족들은 기가 막혔다. 찾았다는 기쁨과 함께 화가 치밀어 올랐다. 아버지가 매를 들고 마구 때렸다. 그러자 이징은 눈에서 흐르는 눈물을 손가락으로 찍어 새를 그렸다.
이징은 조선 중기 때 화가로 호는 허주(虛舟)이다. 뜻은 짐이나 사람을 태우지 않은 ‘빈 배’이다. 이징은 자신의 예술세계를 자신의 호처럼 펼쳤다. 그림 그릴 때 세속적인 요소를 최대한 배제해 자연을 그렸다. 그리고 그림의 여백을 중시해 화폭을 가득 채우지도 않았다. 이징은 화원 집안에서 서자로 태어났다. 부친은 조선 중기 절파화풍의 대가였고 성종의 아들인 익양군의 후손이었다. 따라서 이징은 엄연한 왕실 출신이다. 그런데 제대로 된 벼슬 하나 얻지 못했다. 이유는 서자 출신은 관직에 진출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징은 자신이 왕실 자손인데 왕실 사람들과 사대부들에게 늘 중인 취급받아 서글픈 마음을 갖고 있었다.
이에 대한 일화가 있다. 인조의 셋째 아들인 인평대군이 낙산 기슭에 집을 지었는데 그 집 단청과 벽화를 이징에게 부탁했다. 대군은 이징이 서자 출신 화가이므로 그를 업신여겨 말투도 거칠게 했고, 대우도 낮게 해주었다. 이런 멸시를 받은 이징은 벽화를 그리면서 눈물을 뚝뚝 흘렸다.
이징은 서른이 다 된 나이에 도화서 화원이 됐다. 그전에는 나라 차원의 프리랜서로 일했다. 임진왜란에 공을 세운 사람의 초상화를 그리기도 했고 중국 사신을 영접하는 의궤를 그렸다. 도화서 화원이 된 이징은 그림을 워낙 잘 그려 그림에 관심 많았던 인조의 사랑을 듬뿍 받았다. 이징의 작품 중에 독특한 그림이 있다. ‘만학쟁류도(万壑争流圖)’와 ‘고사기려도(高士騎驢圖)’이다. 각각의 제목을 풀면 첩첩이 겹친 깊은 큰 골짜기를 소리 내 흐르는 강물이란 뜻이고, 나귀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는 선비란 뜻이다.
두 작품은 모두 니금(泥金) 기법으로 그린 산수화다. 검은 비단에 금가루와 아교를 섞어 산수를 그렸다. 검은 비단에 금색이 합치면 그림은 무척이나 화려해진다. 그래서 다른 기법의 작품들에 비해 품위가 한층 높아 보인다. 이런 이유로 니금 기법은 불화(佛畫)를 그릴 때 많이 사용된다. 두 그림은 이러한 기법을 적용했기에 마치 안견의 몽유도원도를 보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마치 안평대군처럼 꿈 속을 거니는 것 같다.
또한 이징의 대표적인 작품으로 갈대와 기러기를 그린 ‘노안도(蘆雁圖)’가 있다. 계절은 늦가을이다. 강물은 무척이나 차갑다. 싸늘한 바람이 불어온다. 으스스 한기가 느껴진다. 강가의 갈대는 바람에 이리저리 흔들린다. 갈대밭에 한 무리의 기러기 떼가 앉아있다. 기러기들은 흐르는 강물을 향해 아름다운 노래를 부른다. 노안도에는 ‘늙어서도 편안하세요’라는 따뜻한 메시지가 담겨있다. 그래서 그런지 노안도를 보면 마음이 무척이나 편안해진다. 국립중앙박물관에는 이징이 그린 ‘평사낙안도(平沙落雁圖)’가 있다. 기러기 떼가 모래밭을 향해 내려앉는 모습을 그린 작품인데 정자 속의 한 선비가 이를 조용히 관조하고 있다. 조선 제일의 화원 이징의 모습이다.
참고자료 : 안휘준 외. 한국의 미술가. 사회평론. 2006.
< 한국대학신문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