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규택 계명문화대 교수
1918년 11월 11일은 제1차 세계대전의 종전일이다. 1914년부터 4년 동안 1000만 명이나 희생된 유럽의 젊은이들처럼 16인의 영국 전쟁 시인들도 기꺼이 전쟁에 참전한다. 영국 전쟁 시인들의 흔적은 웨스트민스터 수도원 대리석에 헌정돼 있다. 오웬(W. Owen) 대위를 비롯한 대부분의 참전 시인들이 대전 중 전사하지만 그레이브즈(R. Graves)와 사순(S. Sasson) 대위는 큰 중상에도 불구하고 기적같이 생존한다. 비록 살아남았지만 이 두 시인은 전쟁의 트라우마로 고통 속에 살아야만 했다. 그들은 전쟁의 참상과 환멸‧위선을 끊임없이 제기하며 무의미한 전쟁의 허상을 냉소하고 풍자하는 시를 남긴다. 이는 생존 시인으로서 전사한 전우들에 대해 자신들이 마땅히 이행해야 할 의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한편 독일 병사로 참전해 자신의 체험을 사실적으로 묘사한 레마르크(E. M. Remarque)도 영국 전쟁 시인들처럼 냉소적인 관점을 견지한다. 그는 『서부전선 이상 없다』에서 전쟁의 허상과 위선을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레마르크를 대변한 페르소나인 보이머는 그가 생각했던 전쟁의 양상과 달리 참혹하고 무의미한 죽음만을 목격하게 된다. 그도 젊은이들을 전쟁터로 내몬 기성세대의 허위와 위선에 눈을 뜨며 반전의식을 갖게 된다.
이 시기 유럽의 제국(諸國)들은 전쟁에 대한 전략‧전술이 여전히 근대적인 한계에 머물렀기에 전투에서 대량의 전사자가 속출했다. 유럽이 산업화에 성공하고 시민혁명 등으로 정신적으로 성숙했다지만 군사나 전쟁에 대한 영역에서는 여전히 근대적인 사고와 관념에 머물렀기 때문이었다. 대량 살육전을 목격한 전쟁 시인들은 전쟁과 병사들에 대한 연민을 시종 주장한다. 그들은 이름 없이 사라져간 수많은 젊은 병사들이 이행한 의무를 고귀하다고 평가하며 무가치한 명령에도 주어진 임무를 완수했던 무명용사들의 고귀함을 기록하고 있다.
참전 영국 전쟁 시인들은 전쟁이란 모티프를 매개로 일관된 전쟁시를 발표하지만 영웅‧서사적인 전쟁의 표현이 아니라 전쟁의 참상을 사실적으로 묘사한다. 즉 영국 전쟁 시인들은 전쟁의 헛된 참상과 위선을 낱낱이 밝힌다. 나아가 젊은이들을 전쟁터로 몰거나 부추기는 정객들의 허상을 지적하고 풍자한다.
그러나 제1차 세계대전 참전 영국 시인들은 전쟁의 참상만을 언급한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이 무가치하고 무의미한 전쟁을 어떻게 종식하고 그 상처를 치유할 것인가를 고뇌하고 언급했다. 오웬 대위는 「이상한 만남」에서 원수였지만 죽음을 통해 양쪽 화자가 마침내 하나가 될 수 있다고 역설했다. 그는 종전 일주일을 남기고 상브르-우아즈 운하(Sambre-Oise Canal) 도하작전 지휘 중 전사한다. 오웬의 시를 흠모했던 사순도 「화해」(Reconciliation)라는 시를 통해 독일군과 연합군 간의 화해를 언급하고 있다. 죽음이 화해를 불러오리란 사순의 주장이 아이러니할 수 있지만 사순은 상처가 큰 만큼 화해의 정도도 더 깊고 완벽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리스도가 죽임을 당했으나 원수를 사랑했고 인류를 죄와 속박에서 구원했듯이, 승자든 패자든 지난날의 증오를 깨끗이 해소하고 화해하자고 역설한다. 영국 전쟁시들은 인류가 전쟁의 아픔과 상처를 치유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화해임을 시종 역설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 해가 가기 전 화해가 우리 사회에 만연한 불신을 말끔히 해소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 한국대학신문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