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형찬 수필가 겸 교육학자
관아재 조영석은 직업 화가가 아니다. 그는 진사시에 합격한 양반이다. 그의 프로필을 보면 장릉 참봉, 사헌부 감찰, 의금부 도사, 이조 좌랑, 종묘 서령, 제천 현감, 형조 정랑 등의 다양한 관직을 지낸 정통 관료다. 참봉은 능을 관리하는 벼슬이고 현감은 지방행정관서인 작은 현을 다스리는 벼슬이다. 조영석은 대과에 급제하지 못해 예순 살이 될 때까지도 말직으로 지방을 떠돌았다. 일흔이 넘은 나이에 간신히 정3품인 당상관이 됐다. 그에게는 삶에 대한 분명한 철학이 있었다. 그는 인간에게는 4가지 욕망이 있다고 했다. 살려고 애쓰는 생욕, 이성을 밝히는 색욕, 벼슬을 탐내는 관욕, 재물에 욕심내는 재욕이다. 그는 벼슬살이하면서 이 4가지 욕심에 빠지지 않으려고 자기 자신을 엄하게 다스렸다. 그래서 조영석은 자신의 호를 ‘관아재(觀我齋)’라 했다. 나를 살피는 집이란 뜻이다.
조영석은 조선미술사에서 손가락 안에 드는 화가다. 조선 후기의 대표 화가로 삼원 삼재를 든다. 삼원은 단원 김홍도, 혜원 신윤복, 오원 장승업이고 삼재는 겸재 정선, 관아재 조영석, 현재 심사정이다. 조영석은 당대 최고의 인물 화가였다. 조선시대에 인물화를 잘 그린 화가가 몇 사람 있었다. 윤두서와 강세황 그리고 조영석이다. 조영석은 윤두서와 강세황에 비해 인물 묘사력이 뛰어났고 조선의 선비정신까지 담고 있어서 그들보다 한 수 위라는 평가를 받는다. 영조가 자신의 선왕인 세조와 숙종의 어진을 모사하라고 두 번씩이나 부를 정도로 인물화에 뛰어났다. 또한 도승지 벼슬을 지내다가 유배 간 친형님 조영복을 찾아가 그린 초상화는 당대 최고 걸작으로 평가받는다.
조영석은 조선 최고의 화가인 정선과 무척 친하게 지냈다. 정말 흉금 없이 지낼 정도로 친했다. 물론 겸재의 나이가 훨씬 많았다. 그런 겸재에게 “산수를 그리는 데는 선생님에 미치지 못하나 인물화를 그리는 데는 선생님보다 제가 조금 나을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얼마나 인물화에 자신이 있으면 당대 최고의 화가에게 그렇게 말할 수 있었겠는가. 조영석은 어진을 모사하라는 임금의 명령을 두 번씩이나 거역했다. 한번은 쉰 살이던 해에 의령 현감으로 부임했는데 영조로부터 세조 어진 제작 감독을 맡으라는 명을 받았다. 그런데 자신은 화원이 아니기에 직책을 맡을 수 없다고 거부했다. 영조는 의금부에 명해 조영석을 잡아 오라고 했다. 조영석은 왕명을 거부한 이유로 파직됐고 옥살이까지 했다. 그때의 심경을 “학문을 배웠으나 과거에 급제하지 못했고 세상 사람들은 나를 그림 그리는 사람으로만 보는구나”라고 통탄했다. 또 한 번은 예순이 훨씬 넘은 나이에 영조는 또다시 숙종 어진을 제작하라는 명을 내렸다. 조영석은 그림은 절대 그리지 않겠다는 각오를 단단히 하고 물러서지 않았다. 어진을 모사하라는 왕명이 계속 들어왔다. 끝까지 거부했다. 이렇듯 자기의 뜻과 맞지 않으면 왕명도 듣질 않았다. 이것이 바로 조영석이 지닌 선비정신이다.
조영석은 어진을 모사하라는 왕명을 거부한 이후로 공개적으로 그림을 그리지 않았다. 혼자서 서민들의 생활을 스케치했다. 후에 자식들이 부친의 소품들을 한데 모았다. 그것이 바로 조영석이 직접 이름 붙인 ‘사제첩’이다. 책 이름을 풀면 사향노루 배꼽이 된다. 사향은 사향노루 향낭에서 채취한 것으로 향기와 약효가 좋아 귀한 한약재로 쓰인다. 사제첩의 그림들을 들여다보면 서민들의 향기를 맡을 수 있다. ‘소 젖짜기’, ‘말 징 박기’, ‘장기 두기’, ‘새참 먹기’에서 서민들의 향기가 펄펄 날린다. 조영석의 그림은 후대에 많은 영향을 줬다. 김홍도와 신윤복 때에 풍속화로 자리 잡으며 백성들로부터 큰 사랑을 받았다. 지금 국립중앙박물관에서는 고 이건희 회장 기증 1주년 기념전인 ‘어느 수집가의 초대’가 열리고 있다. 국보인 정선의 ‘인왕제색도’를 비롯해 조선 최고 화가들의 작품을 만나 볼 수 있다. 이번 기회를 놓치지 말아야 한다.
<한국대학신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