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혜정 교육과 혁신 연구소 소장
“대한민국 교육 패러다임 전환: 평가 혁신을 통하여” 연재를 시작합니다. 연재 내용은 수능과 내신의 평가 혁신을 통해 대한민국 교육 패러다임을 전환하자는 요지이며 이를 실현할 수 있는 구체적인 방법에 대해 다루게 될 것입니다. 연재 목차는 아래와 같습니다. 연재에서 나오는 IB는 국제 바칼로레아(International Baccalaureate)를 말하는 것이고, KB는 아직 존재하지 않지만 앞으로 우리 교육의 평가 혁신을 통해 새롭게 탄생하길 기대하는 가칭 한국형 바칼로레아(Korean Baccalaureate)를 일컫는 것입니다.
- 연재 목차 -
1회. 왜 평가 혁신인가? - 시험이 교육을 결정한다.
2회. 세계 각국의 대입시험은 무엇을 측정하나?
3회. IB 대입시험: 국어, 영어
4회. IB 대입시험: 역사, 과학
5회. 일본의 IB 공교육 도입
6회. 왜 굳이 IB인가?
7회. IB 한국어화 과정
8회. IB 교원연수 및 IB 인증학교
9회. IB 입시/내신 채점 시스템
10회. IB에 대한 우려들
11회: IB 학생이 수능 시험을 본다면? 수능 학생이 IB 시험을 본다면?
12회: KB 현실화 방안
1회. 왜 평가 혁신인가? - 시험이 교육을 결정한다.
폭스 박사 효과
정신과 의사들과 심리학자들이 모여 있는 강의실에 한 사람이 걸어 들어온다. 알버트 아인슈타인 약대를 졸업한 이 분야의 권위자, 폭스 박사다. 그는 ‘의료인 교육에서 수학적 게임 이론을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라는 제목의 강연을 시작한다. 수학적 게임 이론이라는 것은 참석자들에게 다소 생소한 주제이지만, 폭스 박사는 단호하면서도 친절한 말투, 자신감 있는 태도, 점잖은 외모로 참석자들을 사로잡는다. 질문들에도 명쾌하게 답한다. 강연은 30여 분 동안 진행된다. 참석자들은 폭스 박사의 강연에 매우 만족스러워하며 많은 것을 배웠다고 입을 모은다.
그런데 진실은 이렇다. 폭스 박사는 가짜이고, 강연 내용도 전부 가짜다. 이 강연은 1973년 미국의 심리학자 도널드 나프툴린(Donald H. Naftulin)이 했던 실험이다. 나프툴린은 한 무명 배우를 전문가처럼 꾸미고 미리 준비한 강연 원고를 외우게 했다. 이 원고는 엉터리 지식을 짜깁기한 내용이었다. 아무리 생소한 주제라 하지만 의심을 품고 따져 보면 강연 내용이 앞뒤가 안 맞고 공허하다는 사실을 쉽게 알아챌 수 있었다. 그런데도 참석자들은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 남부럽지 않게 가방끈이 긴 참석자들이 어쩌다 깜빡 속았을까? 폭스 박사의 권위를 믿었기 때문이다. 그 믿음의 근거가 된 것은 권위자 같은 외양과 말투와 행동이었다. 정작 그가 강연한 내용은 영향을 끼치지 못했다. 권위를 가진 것으로 보이는 사람의 말을 아무 의심 없이 무조건 신뢰하고 동조하는 것. 이러한 현상을 ‘폭스 박사 효과(Dr. Fox Effect)’라고 한다.
폭스 박사 효과는 우리 교실들에서도 매일매일 일어난다. 교사가 가르치는 내용이 엉터리라는 것이 아니라, 그만큼 학생들이 교사의 권위에 절대적으로 따른다는 뜻이다. 요즘 교사의 권위가 땅에 떨어졌다는데 무슨 소리냐고 반문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물론 스승의 그림자도 밟지 않았다는 과거에 비하면 교사의 권위가 낮아졌다. 최근 젊은 교사들 중에는 권위를 내세우지 않고 친구 같은 선생님이 되고 싶다고 말하는 교사도 많다.
하지만 적어도 수업에서 교사는 여전히 절대적 권위자다. 교사가 가르치는 것만이 정답으로 인정되기 때문이다. 학생들은 교사가 전달하는 내용을 무조건 믿고 받아들여야 한다. 자신만의 의견을 내거나 비판적으로 생각해 볼 여유 따위는 없다.
『서울대에서는 누가 A+를 받는가』(2014)에도 기술되어 있듯이, 나는 서울대 최우등생들을 대상으로 여러 조사를 실시했다. 그중 가장 큰 안타까움을 느낀 결과가 있다. “교수님과 자신의 의견이 다를 때, 혹은 교수님보다 더 좋은 아이디어가 있을 때, 그것을 시험이나 과제에 쓰는가?”라는 질문에 서울대 최우등생 46명 중 41명이나 “아니오”라고 답했다는 것이다. A+를 받기 위한 전략적 선택이라기보다 더욱 근본적인 이유는 교수의 말이 무조건 옳다는 믿음이었다.
“교수님이 저보다 경험도 많고 연구도 많이 하셨잖아요. 교수님 의견이 더 타당한 게 당연하다고 봐요.”
“전 교수님 말씀을 그냥 수용해요. 제가 뭔가 대단한 발견을 새로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니까.”
“제 의견이 교수님 생각이나 관점하고 다르다면 제 의견이 틀린 거겠죠.”
학교에서 배운 것들은 다 옳은 것이고 꼭 알아야 하는 것이라는 믿음, 수업 내용을 잘 숙지하는 것이 곧 잘 배우는 것이라는 믿음, 그러므로 내 생각을 내세우면 안 된다는 믿음. 학생들은 이 믿음이 틀릴 수 있다는 가능성은 떠올리지 못하고 있다. 폭스 박사를 무작정 믿었던 사람들처럼. 그런데도 교사, 학생, 학부모, 그 누구도 이러한 문제점을 자각하지 못하고 있다. 오히려 어떻게 하면 수용적 학습을 더 효과적으로 할 수 있을까 골몰하고 있다.
지금은 코로나19 때문에 주춤했지만 한동안 우리나라에는 토크콘서트라는 것이 유행했다. 좀 더 규모가 크고 대중화된 강연이다. 이때 ‘토크’는 강연자와 사회자 사이에서 이루어지거나 아예 강연자의 전유물이다. 질의응답 시간을 따로 가지기도 하지만 대다수 관객은 끝까지 그냥 관객으로만 남는다. 애초에 토크콘서트에 온 목적이 강연자의 말을 수용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코노미스트》 전 서울 특파원인 다니엘 튜더(Daniel Tudor)의 눈에는 이 광경이 매우 생소했나 보다. 그의 칼럼 「한국인은 왜 토크콘서트에 열광할까」의 일부를 여기에 인용한다.
토크콘서트는 한국적인 현상이다. 내 친구들의 본국에서는 토크콘서트가 한국만큼 인기가 없다. 내 고향인 영국의 경우에도 “저명 비즈니스 분야 작가인 아무개 씨의 리더십 강연을 듣고 왔어”라고 말하는 친구를 본 기억이 없다. (……)
한국에는 왜 이런 ‘전문가 컬트(cult)’가 자리 잡고 있는 걸까. 내 생각에는 권위에 대한 존중과 관련 있다. 특히 한국에 강한 경향이다. 상투적으로 표현한다면, 따지면 안 되는 ‘정답’이 있다고 가르치는 교육 체제의 산물이기도 하다. 그런 교육 체제에서 해답이란, 내가 스스로 해 보는 탐구와 발견의 산물이 아니다.
《중앙일보》 2014.11.8.
토크콘서트는 전형적인 ‘집어넣는 교육’이다. 초·중·고교를 거치는 동안 교사가 일방적으로 전달하는 정답을 무조건적으로 받아들이는 데 익숙해진 학생들은, 대학에 가서도 계속 교수의 강의 내용만을 정답으로 간주하고, 성인이 되어서는 토크콘서트에 가서 정답을 얻기를 갈구하고 있다.
『서울대에서는 누가 A+를 받는가』를 펴낸 후 이런 질문을 참 많이 받았다.
“그래서 교육 문제를 어떻게 하면 되죠?”
“해결 방법이 있을까요?”
그나마 이런 질문은 다행이었다. 비관적인 푸념도 참 많이 들었다.
“문제가 있는 건 알지만, 그래도 교육이 그렇게 쉽게 바뀌나요?”
“도무지 방법이 보이지가 않네요.”
한 진보 정치인은 TV 토론회에 나와 이렇게 이야기했다.
“우리나라의 교육 문제는 미국의 총기 문제처럼 모두가 문제인 건 알고 있지만 아무도 해결할 수 없는 그런 문제입니다. 그러니 교육 문제에 대해서는 정부에게 차라리 아무 것도 하지 말라고 주문하고 싶어요.”
아예 우리 역사나 민족성 탓으로 돌리는 이야기도 있었다.
“유교 문화권이라서 그래요.”
“대대로 이런 식으로 교육했으니 별 수 있나요.”
그런데 따지고 보면 우리나라 교육이 이렇게 된 것은 그리 오래된 것은 아니다. 조선 시대만 해도 분명 이렇지 않았다. 물론 수많은 한자를 암기하는 것이 기본적으로 꼭 필요했고, 『천자문』을 비롯해 여러 유교 경전을 암송하는 것도 중요했다. 하지만 과거 시험에서 응시생들은 주어진 시제에 따라 글짓기를 하지 않았던가. 사안을 꿰뚫어 보는 통찰을 바탕으로 비판적 창의적 사고력을 발휘해야 했다. 성균관에서의 수업이나 왕의 경연은 또 어떠했던가. 질의응답이 끊임없이 오가는 치열한 토론의 장이었다.
우리나라만이 아니라 유교 문화권으로 시야를 넓혀 보자. 유교의 시조인 공자의 교육 방식은 일방적 수업과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멀었다. 공자는 끊임없이 제자들에게 질문했다. 또 제자들의 질문에 대해 하나의 정답만을 말한 것이 아니라 각 제자마다 적절히 다른 답을 주었다. 이것이야말로 오늘날 우리 교육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개별화 맞춤형 교육’이다.
지금 우리 교육 시스템의 역사는 그리 길지 않다. 해방 후 문교부(현재의 교육부)가 설립된 1948년을 기준으로 하면 약 70년이고, 소학교가 서당을 대신하기 시작한 대한제국 때를 기준으로 하더라도 반만년 역사 중 고작 100년이 조금 넘을 뿐이다. 물론 길다면 긴 시간이지만, 그렇다고 해결책을 찾을 수 없을 정도로 고착화되었다고 하기에는 너무 짧은 시간이 아닌가.역사며 민족성을 향한 과도한 질책. 그만큼 사람들은 교육 문제 앞에서 절망감을 느끼고 있는 것이다. 교육 문제만큼은 아무리 해도 해결이 힘들다고 자포자기해 있는 것이다.
물론 그동안 교육 개혁을 위한 시도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국가교육과정도 수도 없이 바뀌었고 대입 제도도 열거하기 어려울 만큼 자주 바뀌고 또 바뀌었다. 그럼에도 상황이 계속 악화되면서 절망감을 키우기만 했다. 이제는 무슨 교육 개혁 방안이 나와도 지레 “우린 안 될 거야”라고 자조한다.
나는 여기서 의문을 제기하고 싶다. 우리가 교육 개혁을 위한 시도라고 믿었던 것들이 애초에 잘못된 시도가 아닐까? 우리의 노력이 엉뚱한 방향을 향해 있었던 것은 아닐까? 병의 근본적 원인은 내버려 둔 채 증상만 완화시키려 한 것은 아닐까? 지난 수 십 년 간의 교육과정 및 입식 개혁은 기본적으로 같은 패러다임 내에서의 수정이었다. 학생 각자 자신만의 생각을 얼마나 잘 “꺼내는지”를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교과서의 지식을 얼마나 잘 숙지했는지를 궁극적으로 평가하는 “집어넣는 교육” 패러다임이 변한 적이 없다.
평가가 이러하다 보니 지난 수 십 년 간의 교육개혁을 한다고 해도, 교육과정과 학교 수업을 아무리 바꾸려도 노력해도, 비슷한 유형의 문제집을 풀고, 비슷한 유형의 능력을 측정했다. 시험에서 어떤 능력을 측정하는지에 따라, 어떤 능력에 고득점을 부여하는지에 따라 학생들의 공부법, 교사들의 교수법, 국가적으로 양성되는 인재의 능력, 사교육 시장의 형태까지 달라진다.
그러니 지식의 수용적 학습만을 평가하는 패러다임이 근본적으로 바뀌지 않는 교육정책은 뭘 해도 결국 마차에서 자동차로 패러다임적 전환이 이루어지는 시기에 고작 조금 더 나은 마차를 만드는 데 전력을 쏟는 격일 뿐이다.
<한국대학신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