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처럼 만난 ‘기자’라는 직업…동아일보에 입사해 최연소 논설위원으로 발탁
‘5공 남산의 부장들’ 저자로 한일 양국에서 55만 부 넘게 팔려, 영화로도 제작돼 대히트
풍부한 경험 토대로 가천대 특임부총장 등 바쁜 나날 보내…한일 관계 개선 ‘앞장’
한일미래포럼의 향후 행보 주목, “양국 대학생 취업 세미나 등 대학생 교류 적극 추진할 터”

김충식 가천대 특임부총장이자 한일미래포럼 대표 (사진=이중삼 기자)
김충식 가천대 특임부총장이자 한일미래포럼 대표 (사진=이중삼 기자)

[한국대학신문 이중삼 기자] 그야말로 ‘스펙터클’(Spectacle)하다. 김충식 한일미래포럼 대표(가천대 특임부총장)를 두고 하는 말이다. 1978년 동아일보 기자로 입사해 최연소 논설위원이 되는가 하면 기자 시절 2년 2개월 간 동아일보 특집판에 ‘남산의 부장들’(박정희 시대 18년 역사)을 연재, 책으로 출간된 뒤 한일 양국에서 55만 부가 넘게 팔렸다. 김충식 대표는 “책이 날개돋친 듯 팔려 하루에 8톤 트럭 두 대로 싣고 간 날도 있었다”고 회고했다. 남산의 부장들은 2019년 이병헌 주연의 영화로도 제작됐고 475만 명의 관객을 동원하면서 대히트를 쳤다. 최근에는 후속편인 ‘5공 남산의 부장들’을 새롭게 써서 펴냈다. 1980년대 전두환 통치 기간 8년의 권부의 핵심(5인 남산의 부장들 : 전두환, 유학성, 노신영, 장세동, 안무혁)에 대한 기록이다. 출간 후 얼마 되지 않아 초판 6000부가 동이 났고 2쇄가 나왔다.

그는 2006년 기자 생활 30년의 마침표를 찍고 대학교수로 전직, 강단에 서다 방송통신위원회 부위원장(차관)을 지냈으며 현재 가천대 특임부총장과 한일미래포럼 대표(이사장 겸임)로 활동하는 등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다. 2020년부터 포럼을 이끌며 한일관계 개선에도 앞장서는 그를 지난달 27일 서울 종로구 관훈클럽신영연구기금에서 만났다. 

■ 대학 하숙방에서 진로 고민…활자에 대한 애착이 기자로 이끌어 = 대학교 4학년 시절 하숙방 창밖 하늘 위로 반짝이는 별을 보면서 그는 진로를 고민했다. “부모의 경제적 지원이라는 탯줄을 끊고 독립해서 무엇을 하며 살아야 하는지 고민이 깊었다”고 털어놨다. 성격이나 소질에서 은행원, 경리사원, 영업사원은 맞지 않을 것 같았다. 전공인 철학과 교수를 꿈꿨지만 학문을 가르치는 일이 생동감이 부족하다고 느껴 교수의 꿈도 접었다. 그런 상황에서 우연히 동아일보 기자 채용공고가 눈에 들어왔고 지원해 당당히 합격했다. “중고교 대학 시절, 갖가지 책은 많이 읽어서 작가가 될까도 생각했지만 생계에 자신이 없던 차에 기자 시험을 봤고 합격해 30년간 운명처럼 생업이 됐다”고 말했다.

청소년기에 조숙했던 그의 독서 습벽은 실로 특별했다. “중학교 시절 삼국지(박종화 작) 다섯 권을 부모에게 사달라고 졸랐다. 하지만 부모님은 학과공부나 하라고 핀잔을 주었다. 그래서 시내 헌책방을 2년 동안 쉬지 않고 뒤져서 낱권으로 흩어져 다니는 삼국지 다섯 권을 모두 사 모았다. 그 다섯 권을 어루만지면서 천금을 얻은 것처럼 뿌듯했다”고 회상했다. 그 삼국지를 되풀이해서 읽고 독파한 건 물론이다.

기자의 생명은 만나기 어려운 사람을 인터뷰해 내는 데 있다는 게 그의 지론이다. 쉽게 만나주는 대상보다 기자를 꺼리는 인터뷰를 통해 덮여진 진상을 파헤치고 독자가 정말로 듣고자 하는 걸 알려주는 게 저널리즘의 생명이라는 것이다. 

그는 만나기 어려웠던 취재원과의 일화를 꺼냈다. “남산의 부장들 연재 중에 김계원 전 중앙정보부 부장을 만나야 할 때가 왔다. 아무리 시도해도 만나주지 않아 어떻게 하면 만나서 취재할 수 있을까, 몇달을 고민했다. 소화불량이 오고 불면도 왔다”며 “그러던 어느 일요일 밤 10시경 눈이 펑펑 쏟아져 문득 이 시간에는 집에 있을 것이라는 촉이 왔고 그가 살고 있는 거주지로 무작정 찾아갔다”고 말했다.

그러나 벨을 눌러도 인기척이 없었다. 30분 간격으로 벨을 누르며 스토커가 됐다. 자정이 넘어가자 김계원 부장은 마음을 열고 취재에 응했다. 날이 밝을 때까지 인터뷰가 계속됐다. “지금도 기자 후배들에게도 말한다. 취재가 어려운 인물일수록 가치가 크다. 쉽게 만나주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러나 눈 내리는 일요일 밤 10시 찾아가면 못 만날 사람은 이 세상에 없다고 가르친다”며 웃어 보였다. 

■ ‘기자→교수→한일미래포럼 이사장’이 되기까지 = 철학 교수의 꿈을 접고 30년간 기자 생활을 이어오던 그에게 기회가 찾아왔다. 사실 그는 교수로 정년을 마친 지금도 ‘교수초빙’ 신문광고를 보면서 가슴 설레어 한다. 문학청년 이래 지금까지도 신춘문예 광고를 보면 가슴이 울렁거리는 것도 어쩔 수 없다고 한다. 소년 시절 그리고 20살 즈음의 원체험과 꿈은 그의 뼛속에 원형질로 새겨져 있었던 모양이다. 그런 그에게 가천대 측으로부터 교수 제안이 왔다. “오랜 지인(차관으로 퇴직한 선배)으로부터 총장을 소개받았고 그 자리에서 대학 강의도 하고 행정도 함께 돕겠느냐는 제안을 받았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청춘 시절의 꿈이었던 교수라는 직업으로 제2의 인생에 도전하기로 마음먹었다. 그해가 2006년이었다.

일본에 관한 관심은 1987년 제13대 대통령 선거 기간에 취재차 내려간 경상남도 진주의 작은 책방에서 비롯됐다. “87년 대통령 선거가 있었고 김종필 후보를 담당했다. 유세차량에 편승해 장기 출장 중에 진주에 갔다. 유세 내용은 그저 그런 반복적인 내용이기에 기자들은 무리 지어 식당에 가고 했는데 혼자서 자그마한 책방에 갔다. 거기서 초급 일본어 사전을 발견했고 지방 순회를 돌면서 심심풀이로 읽고 단어를 외웠다”며 “일본어 방송은 해방 이후, 줄곧 금기시됐지만 88올림픽을 위해서 EBS가 일본어 방송을 시작했다”고 설명했다. 그는 EBS 무료강좌를 통해 독학을 시작했다.

1992년에는 아예 일본 도쿄의 게이오대학에 공부하러 갔다. 쌍용그룹이 1965년 ‘성곡언론재단’을 세워 운영하는 ‘해외 연수 프로그램’에 장학생으로 뽑힌 것이다. “기자 시절 일본 신문이나 한일관계 기록을 많이 읽었다. 좋든 싫든 이사조차 할 수 없는 이웃 나라이기에 우리 국익을 위해서라도 한일관계는 좋아져야 한다고 생각해왔다”며 “한일미래포럼 세미나에도 자주 참석했는데 책임을 맡아달라는 요청을 받아들였다”고 밝혔다. 

■ 코로나19로 멈춘 ‘한일 대학생 교류 활성화’ 다시 가동 = 일본어 사전 읽기에서 비롯된 관심이 그를 한일미래포럼 대표로까지 이끌었다. 한일관계 개선에 중추적 역할을 담당하게 된 그는 올해 반드시 추진하고 싶은 사업이 있다고 말했다. “외교부 등록 사단법인 한일미래포럼은 한일 양국 간의 보다 심도 있는 지적 교류와 폭넓은 상호이해 증진을 목적으로 2005년 1월에 설립된 민간교류 단체”라며 “지난 16년간 새롭게 대두되는 한일 간의 이슈를 주제로 관련 분야 전문가와 정책담당자, 연구자, 언론인, 일반시민, 대학생 등이 참여하는 포럼을 170회 이상 개최해 왔다”고 언급했다. 특히 “한일대학생미래포럼은 21세기 주역들이 그려보는 한일협력과 동북아시아 미래의 진단과 확산이 주 목적이다”며 “미래세대인 한일 대학생들이 주체가 돼 오는 9월에는 한국에서, 같은 해 11월에는 일본에서 양국 간의 제반 문제에 관해 토론하는 활동을 펼칠 계획이다”고 강조했다. 

그는 한국과 일본이 각각의 국익을 위해서라도 서로 간의 과거사에 얽히기보다 미래를 바라보고 가야 한다는 지론을 편다. “서로가 할 일이 너무 많고, 취할 호혜적인 이득이 너무도 많은데 소모전을 거듭하는 건 현명하지 못하다”라는 것이다. “한국과 일본은 연간 1000만 명이 오가는 인접국이며 서로의 교역이 자국 통상에서 막중한 비중을 차지한다”며 “역사는 역사가에게 맡기는 것이 맞고 직접 부딪친 당사자도 아닌 후손들이 과거사 때문에 ‘조개와 도요새’가 돼 물고 뜨는 ‘방휼지쟁’으로 자멸극을 펼치는 건 어리석은 짓이다. 한일미래포럼은 미래세대인 대학생의 교류를 적극적으로 추진해나갈 것이다”고 강조했다. 

인터뷰 말미에는 한일미래포럼의 향후 행보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포럼은 한일 대학생을 대상으로 취업 세미나 프로그램을 진행하고자 한다”며 “특히 일본 현지 취업뿐만 아니라 한국에서의 일본기업과 일본 관련 한국기업 취업 등 취업지역을 넓혀 대학생들의 취업 증진까지 준비하고자 한다”는 의지를 내비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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