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형찬 수필가 겸 교육학자
강세황은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문인 화가다. 그의 호는 ‘표암(豹菴)’이다. 어릴 적 몸에 표범처럼 무늬가 있어 그렇게 붙였다고 전해진다. 그의 작품 중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은 개성 근교를 여행하면서 그린 ‘영통동구도(靈通洞口圖)’다. 그 옛날 고등학교 미술 교과서에도 실린 것으로 기억한다. 특별히 기억나는 이유는 일반적인 조선시대 그림과는 색다른 느낌을 줬기 때문이다. 그림을 가득 채울 정도로 커다란 산이 양쪽으로 있고 산 아래에는 엄청난 크기의 바위들이 널려있다. 정말 무지막지하게 큰 바위다. 그 특이한 바위 모양 때문에 서양화인 줄 알았다. 그림을 자세히 보면 오른쪽 아래에 큰 바위 옆으로 난 작은 산길에 사람이 그려져 있다. 갓 쓰고 도포 입은 양반이 나귀를 타고, 그 뒤로 동자가 따른다. 작게 그려져 있어 놓치기 쉽다.
이 그림은 진경산수이지만 원근법, 음영법, 입체감 등의 서양화 기법을 두루 적용한 매우 실험적인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강세황은 그림에 “영통동구 가는 길에 널려 있는 바위들이 얼마나 큰지 크기가 집채만 하다. 그 큰 바위들에 검고 푸른 이끼가 잔뜩 끼어 있어 보는 사람은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라고 적었다. 그 놀라움을 그림으로 표현한 것이다. 평론가들은 ‘영통동구도’를 조선 회화의 백미라고 극찬한다.
강세황의 또 다른 작품으로 ‘자화상’이 있다. 그의 나이 쉰이 넘어 그린 그림인데 조선 선비의 전형적인 모습이 그려져 있다. 어떤 일에도 흔들리지 않을 일자형 눈썹, 근심과 걱정을 뛰어넘는 둥그런 눈자위, 사물을 깊게 통찰하는 눈빛, 선비 정신으로 빛나는 콧등, 덕과 예를 갖춘 큰 귀, 학문을 단단히 물고 있는 입, 예술의 깊이를 담은 흰 수염 그리고 망건을 쓰고 단아하게 차려입은 두루마기 등등. 강세황은 자신을 학처럼 그렸다.
강세황은 어려서부터 글씨도 잘 쓰고 그림도 잘 그렸다. 여섯 살에 글을 지었다고 하고 열 살이 조금 넘은 나이에는 흘려 쓰는 글씨를 잘 써서 사람들이 그의 글씨를 받아 병풍을 만들려고 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시와 글씨, 그림에 뛰어난 강세황을 사람들은 ‘삼절(三絶)’이라 불렀다. 그는 그림을 보는 안목과 그림을 평할 수 있는 필력도 가지고 있었다. 당시의 화가들은 강세황의 평을 받지 않은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그가 평한 주요 화가들로는 정선, 심사정, 강희언, 김홍도 등을 들 수 있다. 김홍도는 강세황의 제자였다. 김홍도는 어렸을 때부터 강세황에게 그림을 배웠고, 스승으로부터 ‘신필(神筆)’이라는 극찬까지 받았다.
서른 살 무렵, 강세황의 집안은 크게 기울었다. 예조판서를 지낸 부친이 세상을 떠났고, 형은 ‘이인좌의 난’에 연루돼 유배를 갔다. 강세황은 처가가 있는 안산으로 내려갔다. 그곳에는 실학자 성호 이익이 있었다. 그는 이익의 제자가 돼 훌륭한 가르침을 받았다. 이익의 집에는 중국에서 가져온 엄청난 양의 책들이 있었는데 강세황은 이 책들을 통해 중국의 새로운 문물을 배우고 익혔다.
강세황은 예순이 넘은 나이에 처음으로 벼슬길에 올랐다. 세종대왕의 능을 지키는 종9품의 영릉 참봉(英陵 參奉)이 되었다. 그 후 예순여섯 살에는 문신정시에서 급제했다. 문신정시란 당상관 정3품 이하 문신에게 임시로 실시한 과거 시험이다. 일흔이 넘은 나이에 병조참판(종2품)과 한성판윤(정2품)을 지냈다. 그래서 강세황 집안은 영예롭게도 삼세기영지가(三世耆英之家)가 되었다. 할아버지와 아버지에 이어 자신까지 삼대 째 정2품 이상의 벼슬을 지냈기 때문에 기로사(耆老所)에 들어간 것이다. 기로사는 나이가 많은 문신을 예우하기 위해 국가가 설치한 기구였다.
강세황은 말년에 서울 남산 기슭에서 거문고를 즐기며 살다가 한겨울에 병이 들어 세상을 떠났다. 떠나기 전에 붓을 들어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 “푸른 소나무는 절대 늙지 않는다. 학과 사슴이 한꺼번에 우는구나.”
<한국대학신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