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찬규 중앙대 HK+ 인공지능인문학 사업단 단장(인문한국(HK)연구소협의회 회장/국어학회 회장)
지금 우리는 기술 중심의 시대로 접어들었다. 개인적으로 차이가 있겠지만 사회적으로 볼 때 기술이 모든 가치에 우선한다는 의미다. 현대에서 인간은 기술에서 벗어나서 살아갈 수가 없다. 누구나 자신의 의지대로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실상 기술의 발전에 따라 우리의 삶이 달라지는 것을 부정할 수 없다.
기술의 시작은 인간을 위한 것이었지만 시간에 지나감에 따라 상황은 점차 기술을 위한 인간이 돼 가고 있다. 유발하라리는 《호모데우스》에서 인간이 기술을 통해 신이 되려 한다고 말했지만 실상은 인간이 기술에 종속돼 가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신 중심의 시대를 돌아보면, 인간이 신을 인간의 마음속에 내재화했더라면 훨씬 부작용이 덜 했을 터인데, 신을 외재화하고 숭배의 대상으로 삼게 되면서 인간의 이성을 마비시키는 현상이 나타났다.
기술도 마찬가지다. 21세기에 와서는 기술이 더이상 인간 삶의 편리한 도구라기보다는 인간의 삶을 지배하며, 기술을 숭배하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다. 인간은 삶의 최고의 가치인 자유를 기꺼이 버리고 기술에 복종하며 살아가는 길을 가고 있다. 편리함을 삶의 최고 가치로 받아들이면 기술이 인간을 지배하는 것은 시간 문제다. 자동차와 스마트폰이 그것을 대변해 준다. 기계들은 처음에는 인간의 노동력을 덜어주는 도구로 시작됐지만 점차 인간의 욕망을 충족시켜 주는 도구로 발전돼 가며, 나중에는 인간을 지배하는 도구로 변질된다.
AI는 그것을 보여주는 결정체다. 인간의 한계를 극복해주기 위해 시작된 AI는 이제 점차 인간 욕망 실현의 도구가 돼 가고 있다. 군사적으로 활용되며, 온갖 범죄의 수단으로 이용되고 있다. AI의 발달은 인간을 수동화시킬 것이며, 결국 인간은 자유와 의사결정 대부분을 AI에 맡기게 될 것이다. 더군다나 이대로 간다면 극심한 기술 격차로 인해 가난한 자들과 저개발국가에는 크나큰 재앙이 될 소지가 많아지고 있다.
아직 우리가 인간 중심의 시대에 머무르고 있을 때, AI 기술 발전에 대한 방향을 바로 잡아야 한다. 기술 개발을 저지하자는 주장이 아니다. 인간을 위한 기술이 되도록 사회적 장치를 마련해야 한다는 의미다. 제도와 규정, 법규도 필요하지만 기술을 개발하고 사용하는 사람들이 이것이 위험한 도구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인지하고, 인간을 위한 도구로 활용될 수 있도록 사회적 패러다임을 만들어 가야 한다. 인간이 기술의 도구가 되지 않고, 능동적이며, 자존감을 지니고 살아갈 수 있는 존재가 돼야 한다면 말이다. 기술의 시대에 인문학적 접근이 더욱 필요한 이유다.
기술의 발달은 대학 교육에도 많은 변화를 요구하고 있다. 특히 기술에 대한 기본적 이해는 이제 전공에 상관없이 필요해 이미 여러 대학에서 AI+X(모든 전공에 AI를 접목하는 교육)를 실현해 가고 있다. 전공에서 AI를 활용해 효율성을 높여보자는 취지다. 그렇지만 이러한 활용 중심의 교육만을 받으면 졸업 후 10년(대략 2035년)까지는 유용할 수 있지만 10년 이후에는 난관에 봉착할 수 있다. 지금은 인간이 AI를 도구로 활용해 일을 하지만 AI의 발전 방향은 AI가 완전한 Agent 역할을 하는 것이기 때문에 사람의 역할이 축소될 수 밖에 없다. 멀티모달(multi-modal) 기술이나 각종 로봇의 발달과 같이 AI가 인간을 대체하는 물리적 도구들과 접목된다면 AI+X만으로는 감당하지 못할 것이다.
앞으로 AI 기술이 기하급수적으로 발전·확장돼 간다면, 인간이 해야 할 중요한 역할은 AI가 인간에게 유용한 도구가 되도록 조정하는 일이 되리라고 예측된다. 다행히 인류사회가 무분별한 기술 발전의 위험성을 인지하고, 기술을 인류사회에 유용한 도구로 활용해야 한다는 합의에 이른다면 그때 사람들에게 필요한 역량은 기술을 인류사회에 어떠한 목적으로, 어떻게 접목시켜야 할지를 찾아내는 능력이 될 것이다. AI를 단순히 전공에 접목해 효율성을 높이는 것에 더해 그러한 작업이 인간 개인과 사회에 어떻게 유용할 것인지를 판단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만 대학을 졸업하는 10년 후에도 생산적인 일에 참여할 수 있다.
그러한 점에서 대학교육에 ‘H(humanities)+AI+X’ 도입을 제안한다. ‘H+AI+X’ 교육은 인간에 대한 이해와 인간의 가치, 인간 사회의 존재 방식에 대한 이해를 기반으로 자신의 전공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명확히 해 줄 것이며, AI 기술이 어떻게 인간과 인간 사회를 풍요롭게 해 줄 것인지에 대한 통찰력을 제공해 줄 것이다. 이러한 통찰력을 가지고 있어야 향후 기술 중심의 사회에서도 인간의 가치가 존속될 수 있다. 공학자들과 대화나 인터뷰를 해 보면 그 누구도 인간을 해치는 기술 개발에 찬성하지 않는다.
그러나 공학자들의 개별적인 염원과는 달리 기술은 개인과 우리 사회에 화살이 돼 돌아오고 있다. 심지어 신경망 인공지능 원천기술인 트랜스포머(transfomer)의 창시자이며, 올해 노벨물리학상 수상자인 제프리 힌튼(Geoffrey Hinton)마저도 AI로 인한 두려운 미래를 예견하고 있다. 이러한 현실을 아무런 조처없이 계속 바라보고만 간다면 미미하게 유지되고 있는 인간 중심 사회는 종말을 고하고, 결국 기술중심사회로 완전히 넘어가고 말 것이다. 기술중심사회가 되면 우리 사회의 주체는 기술이 되며 인간은 단순한 도구가 된다. 그런 세상이 오기 전에 대학교육에 ‘H+AI+X’ 교육 도입을 촉구한다.
인문학이 인간의 삶을 연구 대상으로 한다고 해서 인문학적 소양이 단순히 삶 속에서 그냥 체득되는 것이 아니다. 인간에 대한 이해는 끊임없이 변화되고 확장되므로 인문학의 내용이나 범주도 달라지므로 체계적인 교육이 필요하다. 쉽게 접근하고 획득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라는 의미다. AI가 전공의 효율성을 높여주는 도구라면, 인문학(H)은 AI+X가 바른 방향에서 꽃필 수 있도록 안내하는 이정표 역할을 할 수 있다. 기존 인문학 분야에서도 이러한 교육의 필요성을 선도해 나갈 수 있도록 ‘H+AI+X’를 위한 통합인문학 구축을 위해 준비해야 할 때다.
<한국대학신문>












































































